배심제를 하는 대표적인 나라인 미국에는 배심원이 되기 어려운 직업이 있다. 의사나 법률가, 사건 관련 분야의 학자 등 전문직이 배심원에 선정되면 판사는 이런 사람들부터 돌려보낸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근거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게 배심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배심원 중 전문가가 섞여 있어 다른 배심원들에게 영향을 끼치면 공정한 판단이 힘들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12명의 보통 사람들로 이뤄진 미국의 배심원단은 유무죄를 직접 결정한다. 판사는 형량만 정한다. 배심원단이 무죄 평결한 사건은 검사가 상소할 수도 없다. 다만 유죄 평결은 배심원단의 만장일치로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유죄가 강하게 의심되는 피고인들이 무죄로 풀려나는 일도 종종 있지만 수사기관이 배심원 만장일치라는 문턱을 넘기 위해 혐의 입증을 더 철저히 하게 되는 순기능이 크다.
▷우리나라 국민참여재판은 판사가 배심원 평결에 꼭 따라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만장일치로 나온 결론일 땐 얘기가 다르다. 1심 재판부가 배심원들의 일치된 판단을 받아들여 내린 판결은 상급심에서 함부로 뒤집어선 안 된다. 최근 대법원은 30억 원 규모 사기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깨고 돌려보내면서 “배심원 만장일치 의견의 무게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유를 들었다. 1심에서 배심원 전원이 무죄로 판단했다면 유죄로 보기에 합리적 의심이 든다는 게 분명히 확인된 것이므로 그에 명백히 반하는 중대한 사정이 없는 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판례들이 쌓이면서 ‘배심원 만장일치’와 ‘1심 법원의 수용’이란 조건이 충족되면 상급심도 판결을 뒤집는 데 신중해지는 경향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결론도 1심 법원이 그와 반대로 판결하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2008년부터 2021년까지 이뤄진 2800여 건 중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결론과 반대로 난 판결이 109건에 달한다. 배심원들 앞에서 재판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인식 때문인지 국민참여재판 건수는 연간 92건(2022년)에 불과하고 배심원들 출석률도 55% 수준에 그치고 있다.
▷배심원 한 명 한 명은 평범한 시민이지만 다양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이들이 만장일치로 내린 결론이라면 사법적인 무게가 실려야 한다. 법원이 이를 가볍게 뒤집어 버리면 국민참여재판이란 제도의 실효성이 흔들린다. ‘어차피 결론은 판사의 몫’이란 한계 안에선 배심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평결에 참여할 동기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배심원단에게 유무죄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을 준 것도 그래야만 배심원들이 고도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재판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받으려면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판결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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