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무가 감싼 산맥 위로 둥근 해가 힘차게 떠오르더니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 하염없이 반짝였다. 비 온 후 고사리와 이끼는 초록빛이 더욱 명료해졌다. 대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 나비와 벌의 기지개,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어린싹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단 몇 분 만에 서울 선유도공원과 북한산국립공원, 울산 태화강국가정원, 백두대간, 함백산, 제주 곶자왈과 여러 오름을 여행한 셈이었다. 사실 내가 앉아있던 곳은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팝업 공간이다. 가로 7m 세로 2.5m의 대형 모니터에 전국의 아름다운 숲이 펼쳐졌다. 실내에 소나무 껍질과 돌을 깔고 향이 좋은 바이텍스 나무를 심었기 때문일까. 가상의 여행인데도 실제 숲속에서 느끼는 상쾌한 행복감이 들었다.
이곳은 산림청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과 블록체인 및 핀테크 전문기업 두나무가 ‘디지털 치유정원’을 내걸고 조성했다. 이번 주 토요일(7일)까지 딱 1주일간만 무료로 열리는 ‘세컨포레스트: 나무, 꽃, 그리고 풀의 위로’라는 이름의 팝업 정원이다.
“디지털 치유정원이 성수동에 열었어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심드렁했다. ‘이것이 디지털 정원이라면 꽃과 숲을 표현한 기존의 몰입형 미디어아트와 무엇이 다른가. 치유정원을 내세울 만큼 치유의 효과는 검증됐는가.’
그런데 함께 찾아가 숲 영상을 본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프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가보고 싶은 곳은 많아도 갈 수가 없잖아. 그런데 이렇게 생명이 움트는 모습을 보고 새 소리를 들으면 ‘나도 얼른 나아 저런 데 가고 싶다. 삶을 더 이어나가고 싶다’ 이렇게 좌절하지 않고 의욕을 가질 것 같아.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갈 희망을 얻는 것처럼.”
주최 측의 의도와 정확히 일치하는 감상에 깜짝 놀랐다. 남수환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정원진흥실장은 말한다. “도시에서 정원을 조성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돼 있으니 한국의 뛰어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정원 인프라를 확대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스마트 가든이나 자연경관 화면이 치유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있습니다. 움직임이 불편한 분들이 접하기 어려운 경관을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는 얘기죠. 팝업 전시가 끝난 후엔 병원으로 옮겨 설치하려고 합니다. 환자들은 디지털 정원을 통해 위로받고, 저희는 장기간의 효과 모니터링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수동이었을까.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니까 치유정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풀과 꽃을 심은 실제 정원도 뒷마당에 조성해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결합해 보려 했어요.”
팝업 공간의 성지인 성수동에서 이번 ‘세컨포레스트’에 대한 젊은층의 호응이 예사롭지 않다. 하루 1000명 이상 방문할 뿐 아니라 인스타그램에 1000개가 넘는 게시물이 올라와 있다. 대부분 2030세대가 올린 인증샷이다. 실제로 가보니 이들은 빈백에 몸을 묻은 채 허브 향기를 맡고, 꽃잎 모양 스티커에 ‘나에게 쓰는 위로의 글’을 쓴다. 그 ‘위로의 꽃잎’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나에게 관대해지자’, ‘잘하고 있어’, ‘지금까지의 너를 사랑해’, ‘내년엔 대학 가자’, ‘너의 길이 맞는 거야. 자신감을 갖자’….
전시기획을 맡은 ㈜조경하다열음의 조혜령 소장은 말한다. “젊은 세대는 위로를 거창하게 여기지 않아요. 그저 어디를 가봤는데 그 공간 안에서 신선함과 행복감을 느끼면 그게 바로 위로이고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죠. 저는 이번 디지털 정원이 일시적 경관을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도시에서 이런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간다면 사람들에게 정원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지 않을까요. MZ 세대가 제주나 강원에 가지 않고도 이곳의 이미지를 인스타에 공유하면서 자연을 마주할 수 있어요.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이죠.”
이번 전시는 몰입형 미디어아트에 비해 스케일이 작지만 디지털과 치유를 접목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숲과 정원의 미래에 투자하는 두나무 기업의 ESG 활동도 박수받을 일이다. 다만 의학적 근거에 기반한 치유정원이라기보다는 전시 제목처럼 ‘위로의 정원’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땀 흘리며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정원이 아니라 ‘핫플’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며 소확행을 얻는 젊은 세대의 소비행태로서의 정원이 지금 성수동의 모습이다.
영화 ‘퍼펙트데이즈’를 통해 일본어 ‘코모레비’(木漏れ日·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가 국내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볼 때마다 그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의 도시에 정원이 많아지면 초록빛 위로를 전하는 순우리말 어휘도 늘어날까. 기술과 만난 가상의 숲속 디지털 나뭇잎은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마지막 잎새’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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