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카트니 전속 사진가’ 김명중의 셔터는 괴로움에서 시작된다[BreakFirst]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9월 8일 0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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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 전속 사진가’로 잘 알려진 김명중 사진작가(MJ KIM)가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국 프레스 어소시에이션(PA), 게티이미지에서 사진기자로 지내다 초상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퇴사 후 사진작가로 자리매김해 매카트니뿐 아니라 영국 팝 걸그룹 스파이스걸스를 비롯해 마이클 잭슨, 조니 뎁, 무하마드 알리 등 세계 유명 인물들을 촬영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공부에는 관심 없고 그저 놀기 좋아하는 10대 소년이 있었습니다. 대학 진학에 관심이 없었기에 대학에 떨어져도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20대 초반 우연히 방송국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생겼고, 미국 유학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비자 발급을 거부당합니다. 유학원을 통해 준비한 서류가 알고 보니 여자 기숙학교 입학 허가서였거든요.

허술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간다며 수많은 지인들과 송별회까지 가졌는데, 처지가 우스워졌습니다. ‘미국 비자를 다시 준비하려면 6개월 이상 걸리는데….’ 급한 마음에 다른 행선지를 찾아 나섰고, 영국 비자는 상대적으로 받기 쉽다는 이야기에 영국행을 결정합니다.

흔하디흔한 도피성 유학 아니냐고요?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비틀스’ 멤버 폴 매카트니의 전속 사진가 김명중 씨(MJ KIM·52)라면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할 법한 청년이 어떤 관성을 깨고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됐을까요. 〈브렉퍼스트〉 팀이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도구: 사진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좌충우돌 끝에 영국의 한 대학 미디어학과에 입학했지만 김 씨 앞에 놓인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고난은 언어였습니다.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끼리 토론도 하고 함께 조별 과제도 해야 하는데,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국에 도착했다고 갑자기 영어가 될 리가 없잖아요.” 자연스럽게 외톨이가 됐고, 학점도 좋지 않다 보니 제적당할 위기에 처했죠.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사진이 들어왔습니다. 사진은 고통받는 유학생에게 생존 수단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사진은 영어가 필요 없고, 혼자 다니면서 촬영하고 암실에서 현상하면 되잖아요. 학교에서 카메라를 빌려 한 번 촬영해 봤는데 그게 저한테 너무 재밌고 편안하고 주눅도 안 들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사진을 시작했습니다.”

사진으로 숨을 한 번 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엔 두 번째 고난이 다가옵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1995년 그가 처음 영국에 갔을 때는 환율이 1파운드당 1350원 수준이었는데,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3000원을 훌쩍 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었던 어머니는 김 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지금 외환위기 때문에 모든 게 힘들어진 건 알지? 네가 한국에 와도 할 건 아무것도 없으니 거기(영국)서 알아서 살아남아라.”

집안의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라’는 어머니의 특명까지 받은 김 씨는 학업을 중단하고 아르바이트에 나섭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면 ‘노스(North·북한)에서 왔냐, 사우스(South·남한)에서 왔냐’고 묻던 그 시절, 20대 한국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전공과 관련 있는 프로덕션 회사 수백 곳에 지원했지만 다 떨어졌고요. 결국 밤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2016년 김명중 사진작가가 폴 매카트니 전속 사진가로서 폭스뉴스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중 사진작가 제공.


웃음을 개발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씨는 영국의 한 조그마한 통신사에서 수습 사진 기자를 찾는다는 신문 광고를 보게 됩니다. 그곳에서 일할 기회는 잡았지만, 새로운 고난이 시작됐습니다. 규모가 작은 언론사라 하더라도 런던에서 일어난 웬만한 사건 사고 소식은 다 다루는 곳이었고, 그래서 대법원 등에서 다루는 굵직한 사건들도 취재해야 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련 인물들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 ‘물 먹지 않고’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데, 외국인이었던 김 씨에게는 쉽지 않은 일들이었죠.

살아남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웃음’이었습니다. 사건 사고와 현장 상황을 잘 파악하려면 결국 현지인인 영국 기자들에게 계속 물어볼 수밖에 없었는데, 인상을 팍 쓰면서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청소년기를 돌아보면 제가 원래 잘 웃는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이때부터 많이 웃으면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던 것 같아요. 일이 끝나면 커피나 맥주 한 잔씩 사주면서 이야기도 나누고요. 좀 더 사람에 프렌들리하게 변하게 된 계기가 아닌가 싶어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던가요. 웃으며 졸졸 쫓아다니는 외국인 인턴 사진 기자를 수많은 영국 기자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도와줬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 기자들과 친해지기도 했고요.

게티이미지 유럽지사의 사진 기자로 근무하던 시절의 김명중 사진작가.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활짝 웃어 보이는 모습이 그의 평소 마인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명중 사진작가 제공.
게티이미지 유럽지사의 사진 기자로 근무하던 시절의 김명중 사진작가.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활짝 웃어 보이는 모습이 그의 평소 마인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명중 사진작가 제공.

그렇게 3, 4년가량 지났을 무렵 김 씨는 영국 주요 통신사인 프레스 어소시에이션(PA)으로부터 정식직원 채용 제안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좋은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쁜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영국 내무부에서 김 씨의 취업 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인데요. 당시 영국은 EU 밖 국가의 국민을 고용하는 데 깐깐한 편이었습니다. 영국이나 EU 국가 내에서도 충분히 사진 기자를 고용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외국인을 채용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추방될 위기에 처한 김 씨. 이런 김 씨의 안타까운 상황에 김 씨와 알고 지내던 영국 기자들이 나섭니다. ‘영국 언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취업 허가를 내주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내용으로 내무부에 항의하는 편지를 쓴 것인데요. 그렇게 모인 편지가 무려 50여 통이었습니다. 영국 내무부는 결국 취업을 허가했고, 김 씨는 PA에서 연예 담당 사진 기자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관성 깨는 원동력, ‘재미’
PA를 거쳐 게티이미지로 자리를 옮긴 김 씨. 전 세계 영화제를 누비며 취재도 했고, 결혼도 했고, 첫 아이도 얻었습니다. 능력도 인정받고 남부러운 것 없는 안정적인 삶이었죠. 한 번의 경사가 더 생겼습니다. 둘째 아이 출산도 앞두게 된 겁니다.
게티이미지 유럽지사의 사진기자로 근무하던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김명중 사진작가 제공.
그때 김 씨의 아내는 육아를 위해 퇴사를 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별안간 김 씨도 퇴사를 감행합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새로운 분야에서 재미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 씨는 사진 취재에 대한 재미를 잃고 초상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데요. 퇴사하고 프리랜서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초상 사진을 촬영하는 연습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정말 무식했다’고 표현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만 가지고 퇴사를 했는데, 6개월 동안 아무런 일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굶어 죽는 줄 알았다고요.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은 많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선택인 것 같아요. 모든 것이 준비되고 이직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또 이직했다고 행복하리란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그저 사진기자에서 사진작가로 넘어가고 싶었어요. ‘옳은 시기’라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기면, 그 열정에 맞는 행동이 뒤따르니까요. 퇴사는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월드 스타가 ‘MJ KIM’을 찾는 이유
굶어 죽을 줄만 알았던 김 씨는 당시 전세계 유명 팝 걸그룹 스파이스걸스로부터 연락을 받게되면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스파이스걸스 멤버들의 까다로운 요구들을 잘 맞춰가며 작업하면서 업계에서 일 잘한다는 입소문도 났고요. 그렇게 업계 관계자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와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틀스’의 멤버 폴 매카트니가 자신의 공연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모습을 김명중 사진작가가 촬영하고 있다. 피아노에 반사된 인물 중 오른쪽이 김 씨다. 김명중 사진작가 제공.
처음에는 매카트니의 전용기를 타고 전 세계를 누비며 그의 공연 모습을 찍는 일 자체가 너무 재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은 간사하다는 말이 있죠. 김 씨의 마음 한 켠에는 ‘똑같은 것이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일에 대한 흥미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은 열정적으로 수천 장을 찍어서 몇 장을 골라내야 하는 작업인데, 처음에는 너무 재밌어서 공연 한 번 할 때마다 몇만 장씩 찍어서 골라냈었거든요. 그런데 점점 매너리즘에 빠졌고, 즐거움과 고마움을 잊게 되니까 사진에 대한 열정도 식더라고요. 그리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영화 포스터나 패션지 표지 같은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매카트니의 전속 사진작가로 3년가량 일하고 있던 어느 날, 매카트니는 김 씨를 앉혀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MJ, 너의 사진이 요즘은 나를 흥분시키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매카트니의 강렬한 한마디에, 김 씨는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실 제 사진이 마음에 안 들면, 저를 바로 해고하고 다른 작가를 찾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분이 매니저에게 ‘괜찮은 작가 좀 찾아와’라고 말하면 전 세계 수많은 사진작가가 앞다퉈 올 테고요. 그런데 그분은 제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 거잖아요. 무언가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이 내 앞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배우게 된 기회였어요.”

김명중 사진작가가 찍은 폴 매카트니의 공연 모습. 김명중 사진작가 제공.
김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매카트니는 왜 오랜 시간 계속해서 김 씨에게 작업을 맡기는 걸까요. 김 씨에게 물으니 ‘저도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 실력이 월등해서 자꾸 저를 찾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제 사진이 다른 프로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같은 작업이라도 재밌게 하면 좋잖아요. 아마도 ‘MJ는 태도도 괜찮은 것 같고, 만나면 만날수록 편하네’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실제로 김 씨는 스튜디오 촬영을 할 경우에도 즐거움과 편안한 분위기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촬영장 분위기도 마찬가집니다. 항상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샴페인부터 맥주, 와인까지 구비해 파티 분위기를 낸다고요. 클라이언트가 흡연자일 경우엔 스튜디오에 종류별로 담배까지 가져다두고요.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면 배우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역할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잖아요. 서로 다 같이 어울리면 (어색하지 않게) 즐거운 분위기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어요.”



‘프로’의 조건: 괴로움
즐거운 분위기에서 촬영하면, 사진작가도 일하는 매 순간이 즐겁지 않을까요? 그런데 정작 김 씨는 사진을 촬영할 때 ‘괴롭다’고 했습니다.

“일단 의뢰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괴로워요. 저는 프로 사진가고, 결과물이 좋아야 한다는 단서가 달린 것이잖아요. 겉으로는 촬영장에 음악도 틀어놓고 파티를 하듯 작업을 하는데, 제 안에서는 만 가지 생각이 교차해요. 내가 잘 하는 게 맞나, 사진은 잘 나오고 있나, 저 사람은 좋아할까 하는 생각들이요. 클라이언트가 제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좋아할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고 행복해져요.”

그렇다면 월드 스타의 전속 사진작가는 자신의 업(業)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작가답게 자부심과 예술적 철학을 갖고 있을 것 같았는데, 김 씨는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직업을 자아실현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직업이란, 하루하루 살아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인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그 행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경제적 보상으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거잖아요. 제가 사진을 찍고 돈을 받아서 삶을 살 수 있는 매 순간이 감사해요.

사진작가는 자기 자신보다는 누군가를 빛나게 해주는 직업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김 씨의 이름 석자 만큼이나 ‘폴 매카트니의 전속 사진 작가’라는 수식어가 알려져 있으니까요. 누군가를 빛나게 하는 삶이 때로는 허무하게 느껴지진 않을까요.

“자기가 원하는 곳이 어디인지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카메라 뒤에 있고 싶은 사람은 자괴감이 느껴질 일이 없어요. 카메라 앞에 싶은 사람이 뒤에 있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자괴감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가 지금 원하는 일을 하고 있나’라고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 같아요.”

인터뷰 시종일관 겸손함과 담백함을 유지하는 김 씨에게 간단한 질문을 하나 던져봤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사진작가 김명중을 할 건가요, 아니면 폴 매카트니를 할 건가요?”

“당연히 폴 매카트니죠!”

김 씨 역시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삶이 조금은 부러웠던 것인가 싶어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그의 대답은 예상과는 사뭇 달랐지만 역시나 담백했습니다.

“사진작가 김명중은 한 번 해봤잖아요. 안 해본 걸 해보고 싶어요!”
청소년기 김명중 사진작가는 놀기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자칭 ‘철부지 망나니’ 소년이 지금의 위치에 서기까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고용 불안정 속에서 다양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내 인생에서 겪은 실패들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인생에서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면 된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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