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남부 쿠르스크주 점령 한 달 맞은 우크라… 전쟁 장기화에 지친 민심 진작
서방 추가 지원 이끌어내고, 휴전 협상 때 쓸 카드 목적도
러, 우크라 격전지 속속 점령에… 우크라 전력 열위만 부각
“판세 뒤엎기 실패” 지적… 美대선이 휴전 협상 분수령
트럼프 “재취임 전 전쟁 종료”… 해리스도 지원 장기화 부담
“우크라이나군의 러시아 쿠르스크주 진격은 우리 승전 계획의 첫 단추다.”(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대응하는 무기로 쓰고 있다. 러시아는 모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힘든 싸움을 계속하겠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남부 쿠르스크주에 ‘깜짝’ 기습 공격을 가한 지 6일(현지 시간)로 한 달이 됐다. 한 달 동안 우크라이나는 서울 면적(605.21km²)의 두 배가 넘는 1294km²의 러시아 영토를 점령했다. 마을 100여 곳을 점령했고, 러시아 군인 500여 명을 생포했다.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발발 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를 점령한 건 처음이다. 외국 군대가 러시아 본토를 공격한 것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무기와 병력 등에서 줄곧 열세였던 우크라이나가 쿠르스크주 진격을 통해 러시아의 허를 찌르며 2년 넘게 이어진 전쟁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단 평가가 나온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를 장거리 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게 허용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게 가장 고무적이다. 그동안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면서도 러시아 본토에 대한 공격에는 부정적이었다. 확전이 우려되고, 무엇보다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주 진격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회의적이었던 서방 국가들의 인식을 일부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다만, 이번 진격이 우크라이나의 약세를 상쇄시킬 만큼 큰 성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러시아는 쿠르스크주에서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동부 전선에서 진격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로 인해, 최근에는 우크라이나군의 핵심 병참지까지 위협받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결국 불리한 건 우크라이나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주 진격 한 달을 맞아 이번 작전의 성과와 의미, 향후 전쟁의 향방에 대해 짚어봤다.
● “쿠르스크주 진격은 회심의 일격”
우크라이나는 전쟁 발발 이후 지금까지 러시아에 총 3번의 ‘대반격’을 가했다. 하지만 모두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쿠르스크주 진격은 우크라이나가 국경을 넘어 러시아 본토로 들어간 첫 번째 작전이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핵보유국이 다른 국가의 침공을 받아 영토를 점령당한 건 역사적으로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쿠르스크주 진격은 수세에 몰렸던 우크라이나의 ‘회심의 일격’이란 평가가 적지 않다. 특히 전문가들은 이번 쿠르스크주 진격이 3가지 측면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했다.
먼저 바닥까지 떨어졌던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전쟁사 연구자 임용한 박사는 “우리도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되살린 상징적인 공격이었다”고 말했다. 대반격 실패에 대한 책임과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불화설로 발레리 잘루즈니 전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이 올 2월 해임된 뒤 침체돼 있던 분위기를 전환시킬 기회였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도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중요한 성과다. 엄구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러시아학과 교수는 “핵을 보유한 러시아가 본토 일부를 한 달 가까이 점령당하는 건 유례가 없는 사건”이라며 “러시아 사람들은 이 전쟁을 시간만 지나면 (승리로) 해결될 것이라 여겼는데, 본토를 공격당하며 ‘우리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주 진격 당시 민간인들이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며 푸틴 대통령이 평소 과시했던 국내 통치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세 번째 성과는 전쟁을 지속하는 데 비관적이었던 국제 사회의 여론을 돌렸다는 점이다. CNN은 “이번 진격은 우크라이나가 싸워서 이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지를 유지하고 무기 사용 제한을 완화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효과를 거뒀다”고 전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주 진격에는 스트라이커 장갑차와 험비 군용차 등 미국이 지원한 장비들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제시했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본토에 미국이 지원한 장비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주제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에 대한 (군사) 역량 사용 제한을 해제할 때가 왔다”고 촉구했다.
● 러, 동부 전선 집중… 우크라 ‘절반의 성공’에 그쳐
하지만 이번 공격이 전쟁의 판세를 뒤집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특히 이번 진격으로 러시아가 동부 전선에 배치됐던 병력을 쿠르스크주로 재배치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왔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동부 전선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결국 병력, 무기, 보급 등에서 불리한 우크라이나가 쿠르스크주에서 장기간 버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전직 독일 국방부 관료인 니코 랑게 유럽정책분석센터 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WP)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에서 점령을 유지할 수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쿠르스크를 지킬 수 없다”며 “푸틴도 이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의 목표가 만약 점령한 영토를 서로 교환하는 것이었다면 이는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가 향후 러시아와의 휴전 협상에서 쿠르스크주를 ‘협상 카드’로 쓸 수 있도록 계속 점령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미 워싱턴 싱크탱크 윌슨센터 역시 “러시아의 전투력은 2025년 말부터 조금씩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며 “우크라이나가 버틴다면 협상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도 있으나, 쿠르스크 작전은 그때까지 우크라이나가 싸움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더욱 우려되는 건, 러시아군이 현재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 포크로우스크 7km 앞까지 진격한 상황이란 점. 포크로우스크는 우크라이나 중심부까지 연결되는 교통과 물류 허브다. 또 우크라이나군의 핵심 병참지다. 이곳이 무너질 경우 우크라이나군 전체 보급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임 박사는 “우크라이나가 쿠르스크주에서 점령한 영토를 끝까지 유지할 필요는 없다”며 “동부 상황에 따라 유연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쿠르스크주 진격으로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지 여론을 환기시켰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 지원 확대로 이어질지도 미지수다. 러시아에선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핵 교리(핵 독트린)’를 수정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 기준을 완화하는 등 지금보다 강경한 모드로 나올 경우 서방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강윤희 국민대 유라시아학과 교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분위기는 이미 회의적인 것으로 안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인 무기 지원은 결국 확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서구에서 확전을 원하는 국가는 없다”고 말했다.
미국이 여전히 자국 무기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WP는 “미국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전반적인 전쟁 수행 능력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며 “우크라이나의 미국 무기 의존도가 높은 탓에 전쟁이 더 확전될 수도 있단 우려가 미국 내에서 되살아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도 러시아의 포크로우스크 진격에 대한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마리아나 베주흘라 우크라이나 국회의원은 포크로우스크에서 남동쪽으로 8km 떨어진 노보흐로디우카를 방문한 뒤 “노보흐로디우카의 참호는 이미 비어 있었다”며 “포크로우스크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고 한탄했다.
● “우크라가 성과 거두면 평화협정 유리”
결국 전쟁의 판세는 쿠르스크주 공격의 성과보다 국외 정세에 영향을 받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대가로 꼽히는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교수는 포린폴리시(FP) 기고문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결정할 핵심 요소는 다른 나라의 지원 여부”라며 “휴전 협상 등이 원하는 대로 타결될 수 있는지는 여기에 달렸다”고 진단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쿠르스크주 진격 이후 서방에 무기 지원을 계속 요구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매락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 상황은 우크라이나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 엄 교수는 “미국은 대선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고, 프랑스는 총선 이후 정세 혼란으로 우크라이나 지원에 소극적으로 바뀐 상황”이라며 “서방이 계속해서 무기 지원을 이어갈 것인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쿠르스크주 진격은 향후 벌어질 휴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의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을까. 일각에선 러시아의 협상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2일 동부 투바공화국 키질의 한 학교에서 공개수업을 진행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협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될지 모르겠다”며 “러시아는 그러한 회담을 거부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미 싱크탱크 유럽정책분석센터(CEPA)의 엘리나 베케토바 연구원도 “우크라이나가 성과를 거둘수록 러시아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휴전 협상에 임할 것”이라며 “이번 공격이 우크라이나가 우월한 위치에서 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전망했다.
● “미 대선이 우크라 운명 좌우할 수도”
현재 우크라이나에 가장 큰 전쟁터는 국경이 아닐 수도 있다. 11월 5일 치러지는 미국 대선이 전쟁의 향방을 가를 핵심 열쇠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군사 지원에 반대하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는 자신이 당선될 경우 내년 1월 취임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강 교수는 “트럼프가 당선되면 우크라이나는 억지로라도 휴전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며 “이 경우 그 시점까지 누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가 서둘러 쿠르스쿠주 진격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CNN은 “미 대선이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만들기 전에 분명한 결과를 얻으려 했던 것”이라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금이 ‘우크라이나의 순간’이란 것을 직감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11월 미 대선 뒤 불쾌한 평화를 강요받거나, 나토의 결속력이 크게 약화되는 상황을 맞이하기 전에 최대한 우크라이나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는 도박에 나섰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겸 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변함없는 지원’을 약속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비슷한 정책 노선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전쟁이 3년째에 접어들며 피로도가 높아진 시점에 취임한다는 부담이 상당하다. 엄 교수는 “해리스 후보가 당선돼도 장기전으로 끌고 가긴 쉽지 않을 것”이라며 “단기간 긴급 지원해서 전황을 (우크라이나에) 유리한 상황으로 바꾸고, 이후 휴전 협상을 고려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의 집중적인 에너지 시설 공격도 변수다. 6월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화력발전 시설 5분의 4와 수력발전 시설 3분의 1을 파괴했다”고 발표했다.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끊임없는 러시아 공습에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수리야 자얀티 전 주우크라이나 미국대사관 에너지국장은 타임지에 “(전력) 기능 장애가 서서히 우크라이나의 체력을 갉아먹고 있다”며 “학교와 기업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으며, 전쟁 비용을 충당할 세수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라고 설명했다.
미 카네기평화재단의 마이클 코프먼 연구원은 포린어페어스 기고를 통해 “전선 상황보다 러시아의 에너지망 공격이 우크라이나에 더 치명적”이라며 “우크라이나가 방어막의 공백을 메워 러시아의 공격을 중단시킬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전쟁은 예상보다 더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