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야기[이준식의 한시 한 수]〈283〉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9월 26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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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하되 서로 얼굴은 보지 않고, 고심하는 품새가 병사를 지휘하는 듯.
상대를 헤아리며 한결같이 죽이려 하고, 자신은 챙겨 한사코 살려고 한다.
형세가 유리하면 먼 곳까지 침투하고, 위기를 틈타 공격하여 승기를 잡는다.
제대로 된 적수라도 만날라치면, 바둑판 앞에 두고 야밤중까지 간다.
(對面不相見, 用心同用兵. 算人常欲殺, 顧己自貪生. 得勢侵呑遠, 乘危打劫嬴. 有時逢敵手, 當局到深更.)

―‘바둑 관전(관기·觀棋)’ 두순학(杜筍鶴·약 846∼904)


바둑은 상대와 생사를 겨루는 제로섬 게임, 종횡으로 뻗은 열아홉 가닥의 길은 반듯한 듯 구불구불하고 평탄한 듯 험난하다. 상대의 수를 예측하며 적시적기에 공수를 반복한다. 시인이 형세와 위기 판단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순전히 훈수꾼의 관전 소회이지만 그 속성이 경쟁이자 싸움인지라 표현이 살벌하다. ‘병사를 지휘하듯’, ‘죽이고 또 살려고 하고’, ‘침투하고 공격하는’ 따위가 시적 언어로는 생경하다.

바둑은 요순(堯舜)이 자식의 두뇌 교육용으로 시작했다는 설이 있지만 전설의 인물이라 믿기 어렵고, 춘추전국 시대의 군사 책략가들 사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외려 설득력이 있다. 제후국 간에 빈번했던 영토 쟁탈전과 영락없이 닮아서다. 후일 바둑은 문인들의 유희이자 소일거리였고 거문고·서예·그림과 잘 어우러지는 고상한 취미였다. ‘싸움 뒤 두 상자에 흑백 돌을 담으면, 바둑판 그 어디에 승패가 남는가’(왕안석·‘바둑’)라는 시구를 보라. 이 얼마나 담담하고 여유로운가.

#바둑#관전#두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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