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선 피로해소제로, 로마男은 최음제로
그리스女는 남성퇴치제로, 중세의사는 살균제로
알고 보면 쓸모 많은 마력 식품 늘 인류와
한국을 대표하는 매콤한 식재료라면 흔히 마늘과 고추를 꼽는다. 특히 마늘은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쑥과 함께 등장할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과연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늘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세계적으로 언제부터 인류는 마늘과 함께했을까. 고고학과 역사가 전하는 마늘의 짙은 맛과 향기를 느껴 보자.
마늘은 파속(Allium)에 속하는 식물로 알리신 성분 때문에 톡 쏘는 맛과 역한 냄새가 특징이다. 하지만 그만큼 살균 작용, 피로 해소, 혈류 개선 등 약리적인 효과 또한 뚜렷하다.
마늘류의 작물이 인간과 함께한 것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자들이 이탈리아 북부의 푸마네 동굴을 조사한 결과 약 3만5000년 전에 백합, 민들레, 파스닙(당근과 비슷한 구근식물) 등과 함께 마늘 같은 식물의 뿌리를 그린 동굴 벽화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식물의 구근은 생장을 위한 여러 영양소를 모아둔 것이니 농사를 짓기 이전 구석기시대부터 주요한 식량원이었다.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는 단순히 일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제사와 주술적인 염원을 기원하며 그린 것이다. 구석기시대부터 마늘은 단순한 식용을 넘어 주술적인 의미도 가진 것이다.
자극적 맛-약리 효과로 사랑받아
빙하기가 끝나고 유라시아 일대에서는 야생 마늘(곰마늘 또는 명이나물)을 널리 식용했다. 특히 덴마크 중석기(구석기와 신석기 사이 약 1만4000년∼6000년 전)의 할스코우(Halsskov)라는 유적에서는 야생 마늘을 구덩이에 저장하고 먹었던 흔적도 나왔다. 지금 먹는 마늘 장아찌처럼 마늘 특유의 독한 맛을 없애고 장기간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유럽은 물론이고 유라시아와 북미에서도 신석기시대 이래 원주민 사이에서도 비타민과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고 입맛을 돋우는 자극적인 맛의 야생 마늘은 널리 사랑받는 식자재였다. 특히나 기나긴 겨울을 견뎌야 했던 유라시아 북반구에서는 필수 요소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먹는 쪽마늘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아쉽게도 식물은 땅속에 묻히면 잘 보존되지 않는 데다 마늘은 역한 냄새 때문에 갈거나 쪄서 먹어서 더욱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다만 식물학적 연구 결과 우리가 먹는 마늘의 기원지는 실크로드의 한가운데인 파미르고원과 톈산산맥 일대 중앙아시아로 알려졌다. 빙하기 직후 이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마늘을 먹는 풍습이 근동과 인더스 등 주변의 고대 문명으로 널리 퍼졌다. 대략 6000년 전부터 근동 지역에서 마늘을 먹은 흔적이 보이는데, 특히 이집트에서 마늘의 흔적이 많이 발견됐다. 이집트에서는 약 5700년 전부터 마늘의 그림이 등장하고 유명한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도 항아리에 담긴 마늘 더미가 발견됐다. 이집트 지역이 건조해서 식물이 잘 남았고, 또한 피라미드 같은 대형 건축물을 만들기 위한 육체노동을 독려하는 데 마늘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약 출애굽기에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이 광야에서 이집트에서 먹던 부추와 파, 마늘을 생각하며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은 유명하다.
사실 마늘 사랑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세계 문명에 남아 있다. 미로로 유명한 지중해의 고대 문명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전에서도 마늘이 발견됐으며,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도 경기 직전 폭발적으로 힘을 끌어올리기 위해 마늘을 사용했다. ‘도핑’과 비슷하다. 고대 로마인들은 마늘을 가장 귀하고 성스러운 식자재로 애용했다.
단군신화 마늘, 現 쪽마늘 아닌 듯
고대사회에서 마늘이 사랑받았던 이유는 향신료가 부족하던 시절 자극적인 맛을 내는 재료였다는 이유와 함께 특별한 약효에 있다. 마늘의 약효는 히포크라테스는 물론이고 3500년 전 쓰인 이집트의 의학서 ‘에버스서(Codex Ebers)’나 인도의 베다에 잘 나와 있다. 인도와 로마에선 자양강장의 효과를 이용해 최음제로 사용하기도 했다. 반대의 경우로도 사용되었으니, 고대 그리스 여성의 축제인 스키라(Skira) 때 여성들은 남편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러 마늘을 먹어서 냄새를 풍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독한 냄새를 풍기면서 강한 살균 작용을 하는 마늘에 악마나 전염병을 쫓는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무덤에 마늘을 함께 넣었고, 중세 페스트가 유행할 때 의사들은 새 부리 같은 마스크와 옷을 뒤집어쓴 뒤 몸에 마늘을 바르고 입안에 마늘을 씹어서 병자의 나쁜 기운을 막고자 했다. 19세기 말에 아일랜드 작가 스토커가 쓴 ‘드라큘라’에서 마늘이 주요한 소재로 쓰인 이유도 이런 믿음의 연장선상이다. 이렇듯 마늘은 그 효능이 천사 같지만 냄새와 맛은 악마 같은 양면성을 지닌 작물이었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늘은 어떤 것일까. 지금 보는 쪽마늘은 대체로 한나라 이후 실크로드를 통해 동아시아로 들어온 것이다. 한반도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지만 어쨌든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늘’과는 관계가 없다. 삼국유사의 원문은 산(蒜)이라 기록되었으니 달래나 산마늘 같은 파속의 맵싸한 풀을 말한 것으로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라시아 전역에서는 곰마늘 또는 산마늘(우리나라에서는 명이나물로 더 알려짐)이 널리 애용되었다.
한국, 진정한 마늘 식문화 종주국
특이하게도 유럽과 유라시아의 여러 민족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해도 산마늘은 공통으로 ‘곰마늘’이라 부른다. 겨울잠을 자고 난 곰이 그 냄새를 맡고 정신을 차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하는 민속학자도 있다. 지금도 시베리아에서는 4, 5월에 눈이 녹으면 제일 먼저 올라오는 ‘체림샤’(곰마늘)가 시장에 등장하면 봄이 왔다고 여긴다. 비타민이 풍부한 마늘은 기나긴 겨울에 지친 사람들의 자양강장제였다. 마늘은 빙하기가 끝난 직후 마치 겨울잠을 깨는 곰처럼 새로운 문명의 시대로 진입하는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약초였다. 아마 빙하기 시절에 푸르른 채소가 그리울 때 가장 먼저 자라나는 마늘은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지난 1만 년간 인간의 역사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늘은 언제나 귀한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면서 마늘이 가진 효능은 지워지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각인되었다. 역한 냄새를 다스리는 제대로 된 가공과 요리법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그 사용도 많이 줄었다. 현재 유럽에서 마늘을 음식에 주로 쓰는 나라는 헝가리나 이탈리아가 거의 유일하다. 헝가리는 고기 수프와 여러 민속 음식에 마늘을 넣는데, 그 이유는 유라시아 동쪽에서 밀려온 마자르족의 문화가 기반이 되어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로마의 영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의 마늘 소비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다. 한국은 마늘을 풍부하게 활용하는 다양한 음식문화를 발달시켜 명실상부한 레시피의 하나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마늘 식문화 종주국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이 마늘을 멀리했어도 한국은 마늘을 꾸준히 사용했고, 이는 역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을 비하하는 소재로 사용되었다. “집 문이 열리기도 전에 조선인들이 좋아하는 마늘 냄새와 간장 냄새…복도에 배어 있었다.”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에 등장하는 조선인 소유 6층 건물에 대한 표현이다. 재일교포가 살던 거리와 건물이 마늘 냄새로 덮였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재일교포는 ‘닌니쿠 구사이’(마늘 냄새)라며 사회적으로 멸시를 당하면서도 마늘이 들어간 한국 음식의 레시피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인의 마늘 사랑은 그러한 차별을 이겨낸 것이기에 더욱 특별하다. 마늘(蒜)은 빙하기 이후 세계인들의 역사와 언제나 함께한 중요한 작물이면서 동시에 가장 한국적인 작물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