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불고 있는 ‘데이터센터 건설 붐’
규제 완화-인프라 재정 지원 3박자… 반도체法으로 첨단기술 공급망 구축
해리스 “미국 데이터센터 세액공제”… 트럼프 “관세 부과, 에너지 비용 인하”
대선 쟁점 떠오른 新산업정책… 美 우선주의에 경제 비효율 우려도
《3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버지니아주 라우든 카운티. ‘데이터센터 앨리(Alley)’로 이름 붙은 대로를 지나자, 구글(Google)이라고 적힌 간판과 함께 ‘직원 외 출입금지’ 경고 문구가 나타났다. 이곳은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이 42억 달러(약 5조6000억 원)를 들여 짓고 있는 데이터센터 캠퍼스 중 하나다. 2018년 처음으로 이곳에 데이터센터를 짓기 시작한 구글은 투자 계획을 크게 늘려 북버지니아에만 데이터센터 캠퍼스 3곳을 구축했다.》
데이터센터 확장에 나선 건 구글뿐만이 아니다. 구글의 경쟁사인 마이크로소프트(MS)는 워싱턴 인근 게인즈빌에 데이터센터를 짓기 위해 4억6500만 달러를 들여 대규모 부지를 사들였다. 라우든 카운티에 이미 3곳의 데이터센터를 구축한 아마존은 지난해 “앞으로 15년간 350억 달러를 들여 버지니아 남부에 새로운 데이터센터를 확장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구글 등 빅테크 기업들이 앞다퉈 미국 내 데이터센터 확장에 나선 까닭은 인공지능(AI)과 클라우드 서비스 등으로 수요가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 정부의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해외 생산시설 자국 내 복귀)과 첨단기술 육성 정책이 주요 배경이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세금 감면 등 금전적 지원은 물론이고, 빠른 인터넷 연결망과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데이터센터의 특성상 제조업 부활을 위한 규제 완화 및 통신 등 인프라 투자가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조업 부활 정책은 올해 미 대선에서도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겸 부통령이 데이터센터 등 첨단기술 산업과 전략 산업에 대한 세액공제 등의 지원책을 내놓은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 겸 전 대통령은 감세와 규제 완화, 에너지 비용 인하로 한국과 중국 등으로부터 제조업 일자리를 빼앗아 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 2년간 34개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
라우든 카운티에 데이터센터가 들어선 것은 1996년부터다. 인터넷 초창기 미국 시장을 호령하던 아메리카온라인(AOL)은 숲과 농장뿐이던 이곳에 첫 데이터 캠퍼스를 설치했다. 수도 워싱턴은 물론이고 웨스트버지니아 등 전력 생산지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어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이 하나둘 이곳에 자리 잡으며 데이터센터 단지로 주목받았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와 조 바이든 행정부를 거치며 이곳은 데이터센터 건설 붐을 맞고 있다. 제조업 부활을 앞세운 트럼프 행정부는 환경 및 건설 프로젝트 허가 절차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간소화했다. 2019년에는 농촌 지역으로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확대하기 위한 200억 달러 규모의 지방디지털기회기금(RDOF)을 출범시켰다. 막대한 전력을 소모하는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설치하려면 전력원이 확보돼야 하고,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농촌 지역까지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가 구축돼야 한다. 미중 무역전쟁에 나선 트럼프 행정부가 화웨이 등 중국 통신기업들이 장악한 5세대(5G) 이동통신 등 첨단기술 경쟁을 위해 규제 완화와 재정 지원에 나서면서 해외로 탈출하던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끌어낸 셈이다.
바이든 행정부에선 2021년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법과 2022년 반도체과학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 투자법(Invest in America Act)’으로 불린 인프라법은 650억 달러를 들여 초고속 인터넷을 미 전역으로 확대하고 전력망 현대화와 원자력 발전소 지원에 170억 달러를 지원했다. 여기에 반도체법 통과로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앞다퉈 미국에 반도체 공장 건설에 나서면서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한 안정적인 핵심 기술 공급망이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지난해에만 이 지역에 18개 이상의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새로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올해도 16개의 데이터센터가 추가로 건설될 예정이다.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의 제조업 부활 정책으로 값싼 인건비와 낮은 규제 문턱을 찾아 중국 등으로 떠났던 미국 기업들이 미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외국 기업들의 미국 직접투자(FDI)도 크게 늘었다. 미 리쇼어링협회에 따르면 2023년 미국으로 돌아온 리쇼어링 기업과 미국 투자를 발표한 외국 기업은 전자장치·부품 산업이 311개로 가장 많았다. 이어 컴퓨터 및 전자제품 295개, 화학 제품이 260개였다.
이에 따라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 역시 크게 늘고 있다. 반도체법이 발표된 2023년 미국으로 돌아온 리쇼어링 기업 및 미국에 투자를 발표한 외국 기업들이 발표한 신규 일자리 수는 약 28만7000개.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 기업들이 빠져나가던 2019년에 미 투자 기업이 창출한 일자리 수 9만8000여 개의 3배 수준에 이른다. ● 대선서도 제조업 부활 정책 경쟁
제조업 부활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미 정치권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올해 11월 대선에서 맞붙는 해리스 후보와 트럼프 후보도 앞다퉈 제조업 부활 공약을 내놓고 있다.
해리스 후보는 지난달 25일 경제 공약을 모은 ‘중산층을 위한 새로운 전진의 길’이란 경제 정책집을 발표하며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는 물론이고 철강 등 기간산업에 대해서도 10년간 1000억 달러의 세액공제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인프라법과 반도체법으로 반도체 등 첨단기술과 친환경 산업에 보조금을 지원한 바이든 대통령의 정책을 확대하겠다는 것.
트럼프 후보는 감세와 규제 완화, 관세 부과를 핵심으로 내걸었다. 미국 투자 환경을 개선하면서 외국 기업에 관세를 부과해 미국으로 투자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것. 트럼프 후보는 1일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기고문에서 “내가 대통령이 되면 다른 나라의 일자리와 공장을 빼앗아 기업과 수조 달러를 미국으로 다시 가져올 것”이라며 “중국에서 펜실베이니아로, 한국에서 노스캐롤라이나로, 독일에서 조지아로 제조업이 대거 이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조업 부활을 내건 미국의 새로운 산업 정책이 ‘신(新)보호주의’로 노골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또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산업 외의 다른 제조업들은 여전히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데다 선거 결과에 따라 지원 대상 산업이 바뀌며 비효율성이 커지는 등 부작용이 크다는 지적도 많다. 뉴욕타임스(NYT)는 “선거 자체가 투자에 찬물을 끼얹는 요인이 되고 있다”며 “기업들은 선거 결과가 세금, 무역정책, 보조금과 규제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선거 결과가 명확해지기 전까지 투자 계획 실행을 미루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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