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를 쓰고, 복수심 가득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과 세계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2016년 대선 때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이런 사설을 썼다. 그런 우려가 현실화한 ‘트럼프 4년’을 겪은 뒤 2020년 대선에선 “트럼프는 현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며 더욱 절실한 어조로 조 바이든 후보를 지지했다. 그 후 트럼프의 대선 불복으로 빚어진 1·6 의사당 폭동을 가장 앞장서 비판한 언론 역시 워싱턴포스트다.
▷2013년 이 신문을 인수한 아마존 창업주 제프 베이조스는 트럼프 집권 이듬해인 2017년 신문 1면 맨 위 ‘워싱턴포스트’ 제호 밑에 이런 문구를 새겼다.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어간다(Democracy Dies in Darkness).’ 트럼프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베이조스는 트럼프 비리를 검증하는 기자 20명 규모의 특별취재팀을 출범시키며 “샅샅이 캐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워터게이트 특종의 주역 밥 우드워드 대기자까지 출격해 석연찮은 재산 형성 과정을 파헤쳤다.
▷그랬던 워싱턴포스트가 이번 대선부턴 지지 후보를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트럼프식 권위주의 회귀의 위험성을 지적해온 논설위원들이 최근 퓰리처상을 수상해 이를 자축하던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카멀라 해리스 후보를 지지하는 사설 초안까지 작성됐는데 베이조스가 게재를 거부했다고 한다. 오피니언 담당 편집인이 사표를 냈고, 논설위원들은 “비겁하고, 끔찍한 실수”라는 성명을 냈다. “트럼프의 위협에 대해 우리가 보도해온 압도적인 증거들을 무시한 것”(우드워드 대기자)이란 비판도 잇따랐다.
▷160년 넘게 지지 후보를 밝혀온 뉴욕타임스에 비해 워싱턴포스트는 지지 후보 공개의 역사가 비교적 짧다. 1976년 대선부터다. 사설에서 언론사의 정치적 지향점을 투명하게 밝히고 기사는 객관성을 지키는 게 미국 언론의 대체적인 전통이지만 그렇지 않은 언론도 있다. 베이조스는 입장문에서 “언론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지지 후보 공개는 우리가 편향됐다는 인식을 키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선거가 임박한 가운데 트럼프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수십 년간 이어온 전통을 뒤집은 것을 놓고 트럼프 눈치를 본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파장은 ‘허리케인급’이다. 벌써 20만 명이 디지털 구독을 취소했다고 한다. 종이신문을 포함해 유료 구독자 250만 명 중 8%가 빠져나간 것이다. 이에 따른 최대 수혜자는 트럼프가 될지도 모른다. 대통령 재임 시절 워싱턴포스트를 “가짜 뉴스”라고 비난하며 연방정부에 절독을 지시하는 등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했던 그가 이런 결과를 누구보다 바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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