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는 듣지 못하던 이 말을 최근 몇 달간 진료실에서 자주 들었다. 9월 날씨가 이래도 되나? 10월 날씨가 이래도 되나? 아니, 수능날에 이렇게 따뜻해도 돼요? 실제로 며칠 전 수능은 역대 가장 따뜻한 수능일로 평년보다 9도 정도 높았다고 한다.
기후는 여러 방식으로 사람의 뇌와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서울대 연구팀이 2003∼2013년 국내에서 발생한 폭염과 정신질환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고온 노출이 정신건강 악화로 인한 입원을 늘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폭염에 장기간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만성적으로 높게 유지되고, 이에 계속 노출된 뇌는 정신질환에 취약해지게 된다.
이렇게 폭염으로 인한 직접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에 따라오는 심리적 변화들이 우울증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기후 위기 상황을 보며 불안, 무력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자 이에 대해 연구하던 미국 심리학회는 2017년 ‘기후 우울증’이란 새로운 우울장애를 제시했다. 2019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68%가 기후변화로 인한 불안을 느꼈다고 한다. 2022년 세계보건기구 또한 “급변하는 기후를 보며 인류는 슬픔, 두려움, 절망, 무력감과 같은 감정을 강렬하게 경험합니다. 정신건강 지원 체계를 갖춘 기후행동이 필요합니다”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기후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하면 ‘기후 위기는 허구다’ ‘겨우 그런 것으로 우울증이라니 배부른 소리 한다’ 등 비난을 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원래 사계절이 뚜렷해 기온 연교차가 큰 우리나라 특성상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그간 부족했을 뿐,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비해야 할 시기다. 나와 내 가족이 지금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집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본다면 불안감, 무력감, 상실감, 그 상실로 인한 우울감을 느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 아닐까?
그렇다면 기후 우울을 예방하고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은 개인의 행동이 의미가 있을까? 유럽연합 기후행동 친선대사이자 다양한 환경 이슈를 알리는 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줄리안은 이렇게 말한다.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일회용 쓰레기들을 보며 한때 심한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고. 애초에 우리 모두가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10%의 사람들만 관심을 갖는다면 비주류에서 주류로 바뀌고 가속도가 붙는다고 믿기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고.
이는 우울과 불안으로 힘들어 하는 분들께 진료실에서 드리는 조언과 결이 같다. 이미 일어난 것을 후회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그저 집중하자고 말씀드린다. 그럴 때 우리는 무력감이 아닌 생동감을 얻을 수 있다. 줄리안과의 촬영 이후 나도 매일 텀블러를 갖고 다니며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있다. 이 글을 접한 분들에게도 작은 변화가 찾아오기를 기대한다.
※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2017년 팟캐스트를 시작으로 2019년 1월부터 유튜브 채널 ‘정신과의사 뇌부자들’을 개설해 정신건강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11월 기준 채널의 구독자 수는 약 23만 명이다. 에세이 ‘빈틈의 위로’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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