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여, 아름다운 신들의/불꽃 낙원에서 온 딸이여,/화염과 같은 열정에 취해/우리 그대의 성소에 들어가노라!/관습이 엄하게 갈라놓았던 것/그대의 마법이 다시 묶어,/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실러 ‘환희에의 송가’)
유독 12월 공연장을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이는 작품들이 있다. 오페라라면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발레라면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합창곡이라면 헨델 오라토리오 ‘메시아’다. ‘라보엠’은 1, 2막 배경이 크리스마스이브이고, ‘호두까기 인형’도 크리스마스이브에 꾼 꿈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메시아’에는 복음서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의 생애를 담겼으니 역시 성탄의 분위기와 어울린다.
반면 4악장에 실러 ‘환희의 송가’를 가사로 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교향곡’을 연말에 연주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일본과 한국에서만 보이는 관습이라는 말도 맞는 듯하다. 하지만 인류가 하나 되는 이상적 세계를 찬미한 이 곡을 듣지 않고서는 한 해를 제대로 보내지 않은 듯한 기분마저 이제는 든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교향악과 합창음악 팬들은 연말마다 이 곡이 선사하는 기쁨의 세례를 통과해야 한다. 올해 서울만 살펴봐도 12월 8일 고잉홈프로젝트, 16일 홍석원 지휘 한경아르테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8, 19일 얍 판 츠베덴 지휘 서울시립교향악단, 21, 24일 피에타리 잉키넨 지휘 KBS교향악단이 이 곡을 무대에 올린다.(8, 16, 18,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9,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올해는 이 곡이 세상에 나오고 200년 되는 해다. 정확히는 1824년 5월 7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케른트너 극장에서 초연됐다. 4악장 가사인 ‘환희에의 송가’는 프리드리히 실러가 프랑스 혁명 4년 전인 1785년에 쓴 시다. 당시 26세였던 실러는 만민의 평등한 결합을 염원하는 계몽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실러가 본래는 시에 ‘환희(Freude)’가 아닌 ‘Freiheit(자유)’라는 단어를 써서 ‘자유에의 송가’라고 썼다가 검열에 걸릴 것을 우려해 ‘환희’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베를린에서 이렇게 가사를 바꿔 지휘했다. 생각해보면 이 말은 맞는 것 같이 들린다. 기쁨은 해방을 가져오는 도구라기보다는 해방된 뒤에 돌아오는 결과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설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이 곡이 나올 당시 베토벤을 둘러싼 세상의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당시 19살이었던 베토벤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프랑스에 가까운 라인강변의 본에서 자라난 베토벤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자유와 해방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는 기대와 달랐다. 나폴레옹은 전 유럽에 군대를 보내 군홧발로 깔아뭉개고 베토벤의 기대는 환멸로 바뀌었다.
그나마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정복군이 법체계나 인권을 근대적으로 개편하는 개혁은 있었지만, 나폴레옹이 패퇴하고 1814년 전쟁을 결산하는 빈 회의에서 세상은 완벽히 과거로 돌아갔다. 인간이 서로 도우면서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아래 슬기롭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이상의 수립부터 좌초까지를 베토벤은 생생히 지켜보았다. 이 곡은 어쩌면 ‘꿈이 있었던 계몽주의적 세계에 대한 후일담’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200년이 흘렀다. 인간들은 여전히 총을 겨누고 있다. 동서를 가른 장벽이 무너지고 번스타인이 ‘자유에의 송가’를 지휘하던 시대의 이상은 좌초하는 듯하다. 다시 장벽을 쌓고 있는 인류도 외계 또는 그 어딘가에서 공동의 적이 침략해 온다면 힘을 합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무망해 보인다. 지금 인류에게는 기후 위기라는 심각한 공동의 적이 있다. 초강대국의 차기 집권자는 그 위기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인물을 에너지 장관으로 앉히려 한다.
기자는 ‘지금 다시 계몽’(스티븐 핑커 지음, 사이언스북스)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인간은 ‘계몽’으로부터 진정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한 채 그 시대를 너무 서둘러 통과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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