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식물은 훌륭합니다” [맛있는 중고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1월 26일 03시 00분


ⓒ ODRI GPT
‘기억하실까요. 날씨가 추워져서요, 황칠이는 잘 크는가요.’

기온이 갑자기 떨어진 날 아침, 다소곳하고 애틋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올해 초 제가 중고거래로 데려온 황칠나무의 안부를 묻습니다.

저와 황칠나무를 거래(‘팔다’나 ‘사다’에 비해 공정한 기분이 들어요)한 분은 야무진 표정의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직거래를 하기 위해 제가 그녀의 단독주택으로 갔고 기다리는 동안 수십 개의 화분에서 뻗어나온 단단한 가지들과 무성한 잎을 구경했습니다. 그녀는 이래저래 얻은 화분들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정원은 우리 아파트 상가의 화원보다 훨씬 풍요로웠습니다. 그녀는 황칠나무를 차에 실어주며 키우기 쉬워요, 물은 자주 안주셔도 돼요, 직사광선엔 두지 마세요, 환기가 중요해서 전 겨울에도 선풍기를 써요 등등 자식을 ‘험한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듯했습니다. 사실 저는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주제에 식물을 보며 무한한 안도감을 얻습니다. 그래서 줄기차게 화원에 들러 플라스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건장한 식물들을 집으로 데려오는데 이내 그 잎들이 처져 버리곤 합니다.

황칠나무가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소심한 답장을 보냅니다. 황칠이가 잭의 콩나무처럼 자란 인증 사진을 첨부하면 좋겠지만, 낚싯대처럼 긴 가지에 하늘한 잎이 붙은 황칠나무의 생김새는 집에서 키우는 한 살짜리 고양이에게 딱 ‘집사 장난감’이어서 아직까지 그 등살을 견디고 있는 것만 해도 대견합니다.

중고거래앱의 중심에 스타일 좋은 MZ세대로 붐비는 명품 매장이 있다면, 가장 먼 쪽에 ‘거대한 식물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중고거래에 한창 재미를 붙일 무렵 밤마다 신기한 중고를 찾아다니다 이윽고 닿게 된 곳이죠. 식물을 거래하는 이웃들은 연령대도 높은 편이고, 분위기도 사뭇 달랐어요. 우리 동네에 옛날부터 살고 있던 다른 ‘인류’의 거주지를 마주한 기분이었달까요.

매일 생장하는 식물은 언제나 새로우면서도 이미 누군가의 손길을 받는 태생적 ‘중고’라는 점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습니다. ‘식집사’의 성실함과 애정이 고스란히 식물에 드러나니 판매자의 표정에서 나름의 자긍심이 느껴지는 것도, 구매자인 제가 집까지 찾아가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중고거래앱의 식물 카테고리에서는 나눔도 많이 이뤄지고 5000원 짜리 화분도 많고, 이름도 생소한 식물들이 수십, 수백 만 원에 거래되기도 하더군요. 역시나 ‘식물계의 에르메스’란 말은 여기서도 통하고요. 단, 중고거래로도 ‘종자업’ 미등록자가 과수나무 등 종자를 생산, 판매하면 안된다는 점은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제가 식물을 거래한 이웃은 모두 단독주택-예전에 ‘이층집’이라고 불렀던-에서 살고 있었고, 작은 집에 거대한 ‘숲’을 일군 재능 있는 주부들이었어요. 제가 처음 데려온 식물은 떡갈나무였는데 세상에 이렇게 작은 떡갈나무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작지만 우툴두툴한 표면이며 오벌형 잎이 딱 떡갈나무였어요. 그 떡갈나무가 새 잎을 내면서 자라나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어요. 드디어 나도 두툼한 흙장갑과 스트로햇을 사야하나? 그 계절 내내 도대체 내가 뭘 잘한 건지 따져본 끝에 중고거래에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떠올랐어요. 최상의 조건을 갖춘 화원에서 살던 식물이 아니라 다른 집 거실이나 사무실에서 자라던 식물이라 물도 제대로 맞춰 주지 못하는 내 손에서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거죠.

아쉬운 건 ’식테크’ 판매자들이 늘어 예전처럼 동네 이웃과 반려식물을 나누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예요. 이층집을 구경하는 일도 줄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고거래를 통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한 번쯤 식물을 거래해 보길 권합니다. 높은 확률로 처음 만난 이웃과 식물이 주는 기쁨에 대해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답니다. 게다가 남이 쓰던 물건에 대한 낯가림도 필요없고, 가짜 명품이 아닐까 의심할 이유도 없죠. 과연, 고양이만큼, 모든 식물도 훌륭한가 봅니다.

당근,고양이,글쓰기를 좋아합니다.

#Goldengirl#골든걸#식물#황칠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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