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수순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화석연료 사랑은 첫 재임 때부터 유명했다. 7월 공화당 전당대회 때도 ‘수능 금지곡’처럼 돌고 돌았던 이 말은 트럼프 에너지 정책의 포고령과도 같다. 워싱턴포스트(WP)가 예견하듯, 텍사스든 알래스카든 이제 파헤쳐질 일만 남았다.
실은 ‘드릴 베이비 드릴’은 트럼프 당선인의 신조어는 아니다. 2008년 마이클 스틸 전 메릴랜드 주지사가 석유 및 천연가스 시추 확대를 강조하며 처음 쓴 슬로건이다. 이후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갖다 쓰더니, 지난해부터 트럼프 당선인이 본인 유행어로 만들었다. 하긴, 누가 봐도 간결하게 머리에 탁 꽂히는 메시지니 그의 입맛에 딱 맞지 않나.
무엇보다 당선인에겐 그걸 ‘현실화할’ 힘이 차고 넘친다. 지체했다간 망할 것처럼, 트럼프 인수위원회는 뚫고 뚫으려 착착 준비에 들어갔다. 더그 버검 노스다코타 주지사를 ‘에너지 차르’라며 내무장관에 지명했고, 미 환경보호청(EPA) 청장은 리 젤딘 전 하원의원을 지명했다. “지구온난화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며 친(親)화석연료 정책을 앞장서서 주장해온 이들이다. 화룡점정은 에너지장관에 지명한 크리스 라이트 리버티에너지 최고경영자(CEO). 천연가스 추출 공법을 개발한 인물로, 기후변화 대응을 “소련 공산주의 같은 짓”이라고 폄하해 왔다.
트럼프 당선인과 측근들은 왜 이리 화석연료에 집착하는 걸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4월 플로리다주 사저 마러라고 리조트에선 미 석유업계 거물들이 참석한 비공개 만찬이 열렸다.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선거자금 10억 달러(약 1조4100억 원)를 지원하면 그들을 옥죄던 각종 규제 철폐를 약속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해수면은 원래부터 오르락내리락했다”는 철학을 가진 당선인에게 이런 거래는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셈이다.
특히 화석연료로 값싼 전력을 확보하면 트럼프 당선인이 주창한 미 제조업 부활에 엄청난 득이 된다. 석유와 천연가스로 생산한 에너지를 수출해 골치 아픈 무역적자를 메울 수도 있다. 공화당 대선 공약집 ‘의제(Agenda) 47’에서도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에너지 보유국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트럼프의 전략은 이미 먹혀드는 분위기다. 전쟁으로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매입이 어려워진 유럽연합(EU)은 미국산 수입을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최근 한 인터뷰에서 “대미 무역수지 관리를 위해 미국산 에너지 수입을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WP에 따르면 호주와 노르웨이 등도 미국 기조에 맞춰 화석연료 개발에 나서고 있다. 어딘들 지금 트럼프 눈치 안 볼 나라가 있겠나.
그가 원하는 걸 얻는 동안 세계는 어디로 흘러갈까. 지난달 유엔 세계기상기구(WMO)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 폭은 1.54도였다. 기후위기 대응의 마지노선이라는 1.5도를 넘어섰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2기 4년 동안 온실가스 배출량이 40억 t 이상 늘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 겪는 이상기후는 다가올 날들에 비하면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뚫린 상처는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감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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