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베네치아는 작지만 매운 고추 같은 존재였다. 영토라 해봐야 몇 개의 섬이 전부여서 다 합쳐도 제주도의 4분의 1 정도, 그러니까 강화도보다 조금 더 컸고 인구 역시 10만∼20만 명에 불과했지만 국력이라는 게 영토의 크기와 비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보여준 도시국가였다.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다시피 하며 무려 1000년 이상 존속했으니 말이다. 비결이 없을 수 없는데 그중 하나가 작지만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베네치아에는 국영 식량 보관 창고가 있었는데 책임자는 매달 정확한 재고량과 유사시 보급 가능 기간을 보고함과 아울러 최저 필요량을 확보해야 했다. 이를 조금이라도 어길 경우 엄벌은 기본이었다. 큰 나라야 가진 게 많기에 몇 번의 실수가 허용되지만 가진 게 없는 작은 나라가 어디 그럴 수 있는가. 적의 침입으로 한 번만 굶주려도 그대로 사라질 수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맡은 책임자일수록 작은 실수도 엄중하게 물어 즉각 교체시켰다. 그래야 살 수 있어서였다. 덕분에 1000년이 넘는 동안 기아 사태가 한 번도 없었다.
자연에서도 마찬가지다. 2016년 영국 옥스퍼드대 도라 비로 교수 연구팀은 철새인 비둘기 무리에서 맨 앞을 나는 리더가 갑자기 교체되는 현상이 가끔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유가 있었다. “비행 도중 무리를 잘못 이끈다 싶으면 바로 무리 뒤로 밀려나고 다른 비둘기가 앞으로 나섰다.” 대륙을 건너는 장거리 이동에서는 작은 잘못이 나중에는 큰일이 되는데, 이러면 무리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야나 툰드라 지역에 사는 늑대들도 비슷하다. 이들은 마치 군대처럼 위계 서열이 강력한데, 무리의 대장이 실수를 계속한다 싶으면 ‘넘버2’나 ‘넘버3’가 대장에 도전한다. 기회만 생기면 권력을 잡으려 드는 ‘콩가루 집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우리의 시각일 뿐이다.
이들이 집단 생활을 하는 건 척박한 환경이 대부분이라 힘을 합쳐야 먹고살 수 있어서다. 그런데 단합된 힘을 만들어 내야 하는 대장이 실수를 계속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두 굶어 죽을 수 있다. 이런 불행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대장이 나서는 것이다. 그래야 살 수 있기에 만든 생존 전략인 셈이다.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군사 전문가 미국의 토머스 릭스가 낸 ‘제너럴스’라는 책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미군이 강군이 된 비결이 조지 마셜 육군 초대 원수(5성 장군) 덕분이었다고 한다. 성과를 내지 못한, 그러니까 ‘자리에 맞지 않는 장군과 장교를 빨리 교체’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인 결과였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초반 밀리던 상황을 반전시킨 것 역시 매슈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부임 3개월 만에 예하 군단장 1명, 사단장 6명, 연대장 14명을 갈아 치운 덕분이었다. 베트남전의 참혹한 패배는 자질이 부족한 장군을 해임한 사례가 거의 없는 결과였다는 말이다. 주변 환경이 어려울수록 제대로 된 리더가 필요한 건 언제나,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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