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은 대한민국이 스포츠로 뜨거웠던 한 해였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한국 축구 대표팀은 그해 5~6월에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썼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한국의 4강을 축하하기 위해 곳곳이 붉은 악마들이 입은 붉은 티셔츠로 가득 찼다. 어디를 가든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가을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또 하나의 기적 같은 드라마가 펼쳐졌다.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이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만리장성’ 중국을 결승에서 이기고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승부였다. 경기 전까지만 해도 누구나 중국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안 그래도 강한 전력의 중국 팀에는 그해 미국프로농구(NBA) 휴스턴으로부터 1차 지명을 받은 야오밍까지 버티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 사이에서도 “제발 20~30점 이상 차로 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국은 4쿼터 종료 3분여 전까지 71-84로 뒤지고 있었다. 그대로 경기가 끝났어도 한국으로서는 선전했다고 할만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한국 선수들이 가로채기에 이은 득점 등으로 추격을 시작하자 중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2점 차로 쫓긴 중국은 허둥지둥하며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자유투를 두 개를 다 놓쳤다. 한국은 종료 4초를 남겨두고 현주엽의 슛으로 극적인 동점을 만들었다.
승부는 연장전으로 들어갔다. 기세를 탄 한국 선수들은 더 이상 중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서장훈, 문경은, 현주엽, 김승현이 돌아가며 득점에 성공했다. 결과는 102-100, 극적인 역전승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경기가 열린 10월 14일은 대회 폐막일이었다. 당초 일정 상으로는 남자 마라톤이 대회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어 있었다. 한국 남자 마라톤의 간판 이봉주는 기대대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그런데 이봉주의 금메달과 남자 농구 금메달 획득 순간이 비슷해졌다. 남자 농구가 연장전까지 치르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끝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 남자 농구는 이봉주와 함께 부산 아시안게임의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우승 주역 중 한 명이었던 문경은 전 SK 감독(53)은 “내 인생에서 그렇게 시원하게 많이 울어본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 뿐 만이 아니었다. 당시 대표팀에는 자존심 세고 실력이 출중했던 선수가 가득했다”며 “하지만 그날만큼은 12명 모두가 하나였다.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 다시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싶다”고 회상했다.
문경은은 대학 시절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슈터였다. 연세대 재학 시절에는 서장훈, 이상민, 우지원 등과 함께 대학 팀 최초로 농구대잔치 정상에 올랐다. 미국 영화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을 닮은 외모로 ‘람보 슈터’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결정적인 순간 승부를 결정짓는 3점 슛을 꽂아 넣곤 했다.
프로에 입단한 뒤엔 13시즌 동안 9347점을 기록했다. 전공인 3점 슛은 통산 최다인 1669개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통산 3점슛 성공률은 39.5%에 이른다.
그는 국제용 슈터이기도 했다. 1993년 22세 이하 세계선수권에서 득점 1위(평균 29.4점)에 올랐고, 1994년 세계선수권에서는 득점 6위(19점), 3점슛 1위를 차지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도 득점 3위(평균 20.3점), 3점슛 1위였다.
그는 3점 슈터를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슛을 쏠 수 있는 선수”로 정의했다. 상황이 아무리 급박하던, 앞에 수비수가 있건 없건 슛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로스 경기에서 결정적인 3점슛을 넣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지만 슛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재형 슈터’라고 생각한다. 순해 보이는 얼굴에 웃고 있는 경우도 많은 탓에 “노력을 안 하게 생겼다”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는 “노력과 고민은 혼자서 하는 것”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하는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3점 슈터로서의 능력도 노력의 산물이었다. 광신상고 시절 하루 300개 안팎의 슛을 던지는 연습벌레였던 그는 연세대에 진학해서는 최희암 감독(현 고려용접봉 부회장)의 혹독한 조련을 받았다. 최 감독은 점심 식사 전 문경은에게 중앙과 양 사이드 등 5개 지점에서 3점 슛을 20개씩 총 100개를 넣는 훈련을 시켰다. 한 지점마다 20개를 연속으로 성공해야 다음 지점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19개를 넣고 20번째에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함께 밥을 먹으러 가기 위해 기다리던 선배들은 처음엔 그를 타박하곤 했다. 하지만 20개씩 연속해서 골을 넣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나중에는 응원과 격려를 해줬다고 한다. 문경은은 “빨리 100개를 연속해서 넣어야 점심을 먹고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3점 슛만 1시간 넘게 던진 적도 있다”며 “당시에는 감독님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감독님이 조직력을 위해 나를 좀 더 혹독하게 대했다고 하더라. 당시의 노력이 이후 선수 생활을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시절 그렇게 착실하게 기본기를 닦아 놓은 덕분에 그는 큰 부상 없이 목표로 했던 40세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은퇴 후 SK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11~2012시즌 감독대행을 맡은 후 2021년까지 10시즌 동안 감독 생활을 했다. 2012~2013시즌에 팀의 창단 첫 정규시즌 우승을 이끌었고, 2017~2018시즌에는 외국인 선수 애런 헤인즈의 부상 공백에도 불구하고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했다. 삼성 선수 시절이던 2001년 우승했던 그는 이로써 선수와 감독으로 우승을 모두 경험한 세 번째 인물이 됐다.
2021년을 마지막으로 감독 지휘봉을 내려놓은 후에는 행정가로 변신해 한국농구연맹(KBL) 기술위원장과 경기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대한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장과 함께 tvN의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주일에 3차례 안팎으로 현장 중계를 한다.
예전 감독을 할 때나 경기본부장을 할 때보다 농구를 훨씬 많이 본다. 시청자들에게 생생한 현장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계를 하느라 놓친 경기들은 쉬는 날 다시보기를 통해 빼놓지 않고 복습한다. 그는 “경기본부장을 2년 하면서 각 팀의 경기를 놓치지 않고 봤다. 그런데 요즘엔 일주일 내내 농구를 보고 또 본다. 중계 뿐 아니라 매일 올라오는 농구 기사들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며 “중계를 시작한 지 두 달 쯤 됐는데 머리에 있는 내용을 짧고 간결하게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기가 여전히 쉽지 않다. 기술적인 얘기보다는 시청자들에게 편안하고 재미있게 다가가려 한다. 문경은만의 색깔 있는 해설을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선수 시절부터 그는 골프로 건강을 챙겨왔다. 골프 자체가 운동이 된다기보다는 비시즌에 술자리에 가는 대신 골프를 치면서 건강을 지켜왔다고 하는 편이 맞는 말이다.
그는 절친한 후배들인 전희철 SK 감독, 이상민 KCC 코치 등과 2000년대 초반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문경은은 “세 명 모두 지기 걸 싫어한다. 서로 경쟁하면서 열심히 치다 보니 지금도 실력이 비슷하다. 요즘도 시간이 맞으면 종종 라운드를 함께 한다”며 했다.
문경은의 장기는 퍼팅이다. 힘 조절, 거리 조절에 자신이 있다. 30m 거리의 롱 퍼트도 홀에 가까이 붙이곤 한다. 그는 “많은 골퍼들이 어려워하는 2m 안팎의 퍼트는 자신 있게 넣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경험적으로 좋은 슈터들이 퍼팅을 잘하는 것 같다. 슛도사로 불린 이충희 선배님이나 대학 후배인 우지원도 퍼팅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더라”며 웃었다.
대신 드라이버가 약점이다. 거리는 멀리 나가지만 아웃 오브 바운스가 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이 때문에 전희철, 이상민 등과 스코어 경쟁을 할 때는 5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치곤 했다. 그는 5번 아이언으로도 보통 주말 골퍼의 드라이버샷과 비슷한 200m 정도를 보낸다.
20년 구력의 그의 베스트 스코어는 이븐파다. 올해 6월에는 생애 첫 언더파를 할 기록할 뻔했지만 마지막 순간 무너졌다. 17번홀까지 1언더파를 쳤는데 마지막 홀에서 더블 보기를 하면서 결국 1오버파로 끝났다.
홀인원도 두 차례 했다. 처음 홀인원을 하고는 2017~2018시즌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했다. 2021년 감독직을 끝낸 뒤 다시 홀인원을 한 번 더 했다. 그는 “두 번째 홀인원이 준 행운 덕분에 KBL 경기본부장도 하고 지금 해설위원을 하면서 농구와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농구 해설을 하면서 한 발짝 떨어져서 농구를 보고 있는 그의 당면 과제는 해설을 좀 더 잘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대표팀 감독을 해보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는 “농구협회 경기력향샹위원장을 하면서 선수들 사이에서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이 크게 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국제경쟁력이라는 게 한꺼번이 생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눈앞의 성적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세대교체와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처럼 한국 농구를 다시 한번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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