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당근마켓 등 중고거래앱은 한바탕 난리가 났어요. 집회에서 눈부시게 빛을 발한 응원봉’때문이에요. 평소 중고 응원봉 가격은 1만 원 정도였는데 여의도 집회 직후 응원봉들은 올라오자마자 구매 희망자가 줄을 섰고 새 상품 평균 가격인 5만 원에도 구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응원봉 같은 굿즈는 팬들의 숫자에 맞춰 생산하니까 주문이 들어와도 바로 만들지 못합니다. 2024년 12월, 이렇게 폭력적인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그래서 모두가 동분서주 구하려 나선 것이 다름 아닌 아이돌 그룹의 응원봉이 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당근마켓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응원봉은 남자 아이돌 ‘엔시티’의 공식응원봉인 ‘믐뭔봄’이에요. 집회에서 믐뭔봄은 토르의 망치처럼 압도적인 사이즈와 형광 연두빛으로 전 세계 언론의 시선을 끌었고 단숨에 중고거래 트래픽 1위에 올랐죠. 엔시티 응원봉의 애칭이 믐뭔봄인 건 원형이나 횃불형인 다른 응원봉과 달리 네모 면이 모인 직육면체 형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돈까스용 망치라고 놀림을 당한 ‘오리’였다는데 이번 시위에서 앞뒤에 ‘탄’자와 ‘핵’자로 ‘응꾸(응원봉 꾸미기)’를 하고 ‘백조’처럼 날아오른 거예요.
남자 아이돌 ‘샤이니’의 응원봉은 보석 브랜드 ‘티파니’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민트색에 엄청난 발광력으로 집회 현장에서도 보석처럼 빛났는데 요. 2008년 데뷔 아이돌의 위엄을 보여주듯 응원봉에도 ‘피(프리미엄)’가 엄청 붙어있더라고요.
혹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린 응원봉도 보셨나요? 힙합 뮤지션 ‘에픽하이’의 응원봉 ‘박규봉’을 이번에 처음 봤는데요. 데뷔 20년 만에 내놓은 ‘힙합’ ‘응원봉’이라면 이 정도 분노는 표현해야 마땅한가 봅니다. 다른 응원봉들이 쏘아올린 추상화같은 빛 속에서 구체적으로 소리를 낸 박규봉 씨, 조금 옛날 사람 같아서 더 반가웠어요.
중고거래에서 가장 애타는 건 ‘뉴진스’의 응원봉 ‘빙키봉’을 구하려는 사람들같습니다. ‘뉴진스’가 소속사였던 ‘하이브’와 결별했으니 공식샵을 손절하고 비싸더라도 중고거래를 통할 수밖에 없어서예요. 그래서인지 뉴진스 팬들은 만날 때마다 토끼 모양의 빙키봉 귀를 맞대며 서로 응원하는 모습이었어요. 아이돌에 따라 응원봉 중고가격도 이렇게 달라지네요.
아스팔트 위에 촘촘히 박혀 빛나는 응원봉들을 보고 ‘집회인가 콘서트인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그들은 ‘내게 가장 소중한 빛을 들고 나왔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누가 의심하겠어요. 집회에서 압도적으로 많았던 20대 여성의 응원봉과 50대 남성의 주먹 쥔 맨손이 서로를 ‘리스펙’하는 분위기도 분명했어요. 중년 아빠가 “딸이 응원봉을 들고 가기에 나는 작업용 헤드랜턴을 갖고 나왔다. 내게 야근수당을 주는 가장 소중한 빛”이라 말한 인터뷰도 본 걸요.
원래 12월의 당근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별다방’의 ‘프리퀀시’지요. 캐롤이 계절의 시작을 알리면, 트리도 준비하고 ‘혈당 피크’를 부르는 성탄 커피와 프리퀀시를 모아 새해의 다이어리나 문구용품을 받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쓰지 않아도 빨간 표지의 가계부를 사기도 하고요. 중고마켓에서 프리퀀시 셋트(커피 17잔에 해당)를 사서 새 다이어리를 준비하는 것이 나름의 ‘송년 의식’인데, 예년 2만∼2만5천 원이던 프리퀀시 셋트가 올해 1만5천 원에 거래되고 있어서 놀랐어요. 전보다 커피 브랜드 굿즈의 인기가 식어서, 새 다이어리를 준비하기엔 불안한 12월이 끝나지 않아서겠죠.
사실 저도 중고마켓에서 응원봉 찾느라 성탄도, 다이어리도 잠시 잊었어요. 팬클럽 회원이 아니기에 순전히 미학적, 실용적 관점에서 응원봉을 골랐는데 ‘감히 팬도 아닌 주제에 응원봉을’이라고 한다면 팬들에게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이돌 팬이 아니어도 응원봉을 들 수 있는 게 좋았어요. 경쟁하던 아이돌의 각기 다른 응원봉이 한데 모인 것도, 나의 20대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지만 응원봉을 잡은 내 손을 보는 게 좋았어요. 새해엔 화분이나 운동기구를 뒤적뒤적 찾아보고 싶습니다. 동네 이웃님들 모두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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