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이후 정치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올해 연말 소비 심리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내수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는 소득과 신용도 하락으로 빚 부담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24일 한국은행의 ‘12월 소비자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번 달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88.4로, 11월보다 12.3포인트 떨어졌다. 이는 팬데믹 발발 초기였던 2020년 3월(―18.3포인트) 이후 최대 하락 폭이다. 지수 자체도 2022년 11월(86.6) 이후 2년 1개월 만에 최저 수준이다. CCSI는 경제 상황 전반에 대한 소비자 심리를 나타내는 지표로 100보다 높으면 낙관적, 낮으면 비관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지난달(100.7)까지만 해도 100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달 3일 비상계엄 이후 정치 불안이 이어지면서 큰 폭으로 하락했다. 특히 CCSI 구성 지수 중 현재경기판단(52)과 향후경기전망(56)이 전월 대비 각각 18포인트 급락했다.
황희진 한은 통계조사팀장은 “미국 대선 결과에 따른 수출 둔화 우려 등으로 11월 소비자심리지수가 하락했는데, 이달 초 비상계엄 사태가 지수 하락 요인으로 추가됐다”고 말했다.
이런 소비심리의 급랭은 가뜩이나 내수 침체로 한계 상황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을 더 벼랑 끝에 내몰 것으로 보인다. 이날 한은의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3분기(7∼9월) 말 자영업자의 대출 연체율은 1.70%로 2015년 1분기(1∼3월·2.05%) 이후 9년여 만에 가장 높았다. 특히 취약 자영업자의 대출 연체율은 11.55%에 달해 2013년 3분기(12.02%) 이후 11년 만에 최고치였다. 또 중소득·중신용 이상 자영업자 중 저소득층(소득 하위 30% 이하)으로 떨어진 인구만 2만2000명에 달했고, 저신용 자영업자도 올해 들어 5만6000명 늘었다.
24일 찾은 서울 서대문구의 한 대형마트.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한산한 모습이었다. 델리 코너를 서성이던 최순희 씨(44)는 이날 저녁 친구들과의 송년회를 준비하면서 유린기와 양장피를 살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예전 같았으면 연말이니 중국집 가서 거하게 외식을 했을 텐데 그냥 간편식을 사서 집에서 먹기로 했다”며 “연말 모임 예산을 절반으로 줄이다 보니 2차는 아예 안 간다”고 말했다.
12·3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감이 얼어붙은 내수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비상계엄 직후 닫힌 지갑이 ‘연말 대목’을 무색하게 하는 데다 내년 1%대 저성장 가능성까지 점쳐지면서 당분간 소비가 살아나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꺼져 가는 소비 불씨로 취약계층의 피해가 커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정부와 여야가 신속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꽉 닫힌 지갑… 연말 대목 노린 소상공인 ‘울상’
대형마트 점포에서 각종 젓갈과 게장을 판매하는 김정미 씨(70)는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소비가 줄어드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30년 넘게 유통업에 종사하며 매년 누려 온 ‘연말 특수’가 올해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김 씨는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앞두고는 게장이 금세 동날 만큼 팔리곤 했다. 올해는 시국이 시끄러우니 다들 개인적인 축하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안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비상계엄 이후인 4∼13일 신용카드 일평균 사용액은 2조5102억 원으로 집계됐다. 한 달 전 같은 기간보다 3%가량 감소한 것으로, 통상 연말 성수기에는 카드 사용액이 느는 것과 반대되는 흐름이다.
불안한 국내 정세에 연말 회식과 모임이 줄줄이 취소된 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식당에서 모임을 하는 연말이 전통적인 주류 판매 성수기인데 연말 특수를 다 놓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형마트 한 곳은 이달 주방용품과 퍼스널 케어(헤어케어·뷰티상품 등)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각각 10%, 5% 줄었다. 그나마 식품군 매출 증가세가 이를 상쇄하고 있지만 비식품군 매출이 떨어지면서 이달 매출 신장률은 전년 대비 ‘제로’다. 소비자 한 사람당 객단가가 높은 백화점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안 그래도 물가가 비싸고 소비 심리가 활발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비상계엄 이후 이어진 탄핵 정국으로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전했다.
● 치솟는 환율에 여행도 포기, 기부 행렬도 주춤
치솟는 환율에 연말 기념 여행을 포기했다는 사람도 많다. 자영업자 최정하 씨(39)는 “계획했던 여행은 돈이 너무 많이 깨져 올해 말에는 조용히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했다. 직장인 조연경 씨(35)도 매년 1월 1일 떠난 강원도 여행을 올해는 취소했다. 조 씨는 “서울에서 세 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가는 기름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탄핵 정국으로 환율은 물론이고 기름값도 올라 불필요한 운전은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연말연시 기부행렬도 멈추면서 ‘사랑의 온도탑’은 100도를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23일까지 모금한 금액은 3027억 원으로 집계됐다. 올해 목표액(4497억 원)의 67.3%로, 목표액의 1%마다 1도씩 오르는 사랑의 온도탑은 현재 67.3도에 머물고 있다. 올해 주요 기업들이 이미 기부를 마친 상황이라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1억 원 이상 기부한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의 신규 회원(20명)도 지난해(55명) 대비 절반 이상 줄었다.
전문가들은 내년 상반기(1∼6월)까지는 경기 침체가 이어질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과거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도 탄핵 이후 대선이 시작되면서 경기 기대감이 살아나 내년 상반기까진 소비 침체가 이어질 것 같다”며 “여야를 떠나 경제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정부 역시 신속하게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