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기후가 잦아진 데다 장기간 계속된 고물가로 4인 가구의 월평균 식비가 130만 원을 넘어서며 사상 최대치를 다시 썼다. ‘12·3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수입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원-달러 환율마저 치솟고 있다. 내년에도 먹거리 물가 급등세가 계속되면 가계 살림살이는 더욱 팍팍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25일 동아일보가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올해 3분기(7∼9월) 4인 가구의 월평균 식비는 134만8000원으로 집계됐다. 1년 전보다 4.1% 증가한 규모로, 2019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130만 원을 넘어섰다. 식비는 식료품 및 비주류 음료 구입비와 외식에 쓴 돈을 합친 금액이다. 식료품 및 비주류 음료 구입비가 전년보다 3.5% 증가했고, 외식비는 4.7% 늘었다.
4인 가구 월평균 식비는 지난해 3분기 사상 최대치인 129만5000원을 보인 후 2개 분기 연속 하락했다. 하지만 올해 2분기(4∼6월)부터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고, 3분기에는 직전 분기보다 7.1%나 급등하며 상승 폭이 커졌다.
이상 기후로 공급 차질을 불러 장바구니 물가를 끌어올리는 ‘기후인플레이션’의 영향이 큰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올여름 늦더위가 지속되며 농산물 가격은 급등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11월 채소 물가 지수는 1년 전보다 10.4% 뛰었다. 24일 무 한 개의 평균 소매가격은 전년보다 86% 높은 수준을 보였다. 원재료 가격 상승 등의 영향으로 11월 외식 물가 지수 역시 지난해 11월보다 2.9% 오르며 5개월 연속 2%대 상승률을 이어갔다. 전체 물가 상승률이 최근 3개월 연속 1%대를 보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대기업을 다니는 김모 씨(38)는 최근 점심을 먹기 위해 인근 분식집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오랜만에 치즈김밥 한 줄과 일반 라면으로 한 끼를 해결했는데 1만 원이 넘는 금액이 나온 탓이다. 메뉴판 가격을 다시 보니 일반 봉지 라면을 끓여주는 것이 5500원이었고 김밥 한 줄은 속 재료와 상관없이 대부분 5000원이 넘었다. 김 씨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점심 식대가 1만 원인데, 이제 이 돈으로는 김밥 한 줄에 라면 하나도 먹지 못한다”며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는 직원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최근 장바구니 물가 오름세는 가구 소득 증가 속도의 2배에 달한다. 특히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김치의 필수 속 재료인 무, 배추 등 농산물과 서민들의 대표 외식 메뉴인 김밥, 떡볶이 등의 가격 상승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 소득 증가 폭의 2배로 뛴 식비 부담
25일 동아일보가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4인 가구가 마트 등에서 장을 볼 때 지출한 식료품·비주류 음료 구입 비용은 올해 3분기(7∼9월) 65만8000원이었다. 1년 전보다 3.5% 늘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쓰는 외식비는 69만 원으로 전년보다 4.7% 뛰었다. 모두 2019년 관련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이후 최대치다.
식비 부담은 가구 소득의 2배에 달하는 속도로 커지고 있다. 4인 가구가 식료품·비주류 음료 구입과 외식비에 쓰는 비용은 최근 1년간 4.1% 늘었는데, 이 기간 근로소득과 이자, 사업, 이전 소득 등을 합친 경상소득은 월평균 788만2000원에서 806만2000원으로 2.3% 늘어나는 데 그쳤다.
특히 이상 기후에 따른 농산물 가격 급등세가 좀처럼 잡히질 않고 있다. 지난달에도 무(62.5%)와 열무(43.0%), 배추(16.0%) 등 겨울철 김장에 필수적인 재료 가격이 1년 전보다 크게 뛰며 오름세를 이어갔다. 외식 물가 역시 마찬가지다. 서민들의 대표 외식 메뉴인 김밥(4.9%), 떡볶이(5.6%), 치킨(5.2%) 등의 가격 상승률이 높았다.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대까지 떨어진 것과는 상반된 흐름이다. 전체 물가 상승률은 올해 9월 1.6%를 보이며 3년 6개월 만에 1%대로 낮아졌고 10월과 11월에도 1%대를 이어갔다. 하지만 식비 부담이 늘어나면서 1%대까지 떨어진 물가 상승률을 여전히 체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 내년에도 먹거리 물가 상승 지속 전망
먹거리 물가 상승은 내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정국 등에 따른 국내 정세 불안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재집권이 불러온 고환율 여파로 수입 단가가 더 높아져 국내 식품·외식업계의 가격 인상이 불가피한 탓이다. 이미 지난달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19개월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식품업계는 통상 약 3개월 동안 사용할 원자재를 미리 구매해 놓기 때문에 최근의 식자재 가격 상승은 내년 1분기(1∼3월)부터 본격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생산 원가에서 원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60∼70%인 식품산업과 30∼40%를 차지하는 외식산업에서 물가 인상의 압력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기후변화 여파로 농산물 수급 불안과 가격 변동 문제가 되풀이되자 부처 내에 ‘농식품 수급안정지원단’도 설치했다고 이날 밝혔다. 지원단은 내년 6월 19일까지 6개월간 운영되고 필요한 경우 운영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향후 농식품 긴급 가격 안정대책을 수립하고 주요 농식품 수급과 가격 동향을 관리할 예정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국내 정세와 고환율로 인해 원재료 수입 가격이 오르면서 한동안 먹거리 물가 고공행진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국민이 체감하는 물가 상승률의 괴리가 큰 상황이라 농산품 같은 1차 생산품 가격 상승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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