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시빅 판매가가 10만 위안(약 2000만원), 폭스바겐 파사트는 13만 위안(2500만원). 지난해 말 중국 자동차 시장에선 ‘대 바겐세일’이 펼쳐졌습니다. 기간 한정 가격 인하, 신차 구매 보조금, 포인트 지급, 계약금 무이자 혜택 등등. 거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가 각종 명목의 차값 할인을 내걸었죠. 지난해 1~11월 가격 할인을 내 건 승용차만 224개 모델에 달한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입니다. 특히 인기 차종인 테슬라 모델Y는 사상 최저가격인 23만9900위안(약 4800만원)에 팔렸습니다.
이런 바겐세일, 해가 바뀌어도 계속됩니다. 이미 중국 전기차 제조사 BYD는 다가오는 설(춘절) 연휴를 겨냥해 주요 차종 가격을 한시적으로 최대 12% 인하한다고 치고 나왔죠. 선두권 업체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니, 다른 경쟁사도 이를 따르게 될 겁니다. 이미 니오, 샤오펑, 립모터 등. 주요 전기차 제조사 경영진이 2025년 판매량(또는 매출)을 지난해의 두 배로 늘리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죠.
놀라운 건 이런 가격전쟁이 벌써 만 3년째 이어지고 있단 점입니다. 시작은 2022년 10월 테슬라의 모델3와 모델Y 공식 판매가 인하(최대 9%)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눈치 보며 뭉그적거렸던 다른 브랜드는 이후 석 달 만에 테슬라가 추가 가격 인하에 나서자 깜짝 놀라 가격경쟁에 가세했죠. 특히 중국 최대 전기차업체 BYD는 “전기가 석유보다 싸다”는 구호를 내걸고 가장 맹렬하게 뛰어들었습니다. 거의 모든 모델 가격을 5~20% 낮췄는데요. 특히 소형 전기차 친(Qin) 하이브리드 신형 가격을 기존보다 2만 위안 낮은 7만9800위안(1600만원)으로 책정해 업계를 놀라게 했죠.
결국 2024년엔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부터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까지, 대부분이 가격전쟁을 펼쳐야 했습니다. 가혹한 난투극, 잔인한 탈락전이 시작됐습니다. 중국 전기차 업체 샤오펑의 창업자인 허샤오펑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 자동차 시장은 “피의 바다”를 헤쳐가는 “녹아웃 라운드에 진입”했죠.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에 파산·철수
적정 수준의 가격 인하는 판매량을 늘려 기업 이익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죠. 하지만 중국 자동차 시장의 가격전쟁은 그런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지난해 1~10월 중국 자동차산업 전체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2% 증가했지만, 이익은 3.2% 되레 감소했습니다. 과거 6~7%였던 매출액 대비 이익률은 4.5%로 쪼그라들었죠. 제 살 깎아먹기식 가격경쟁 탓입니다.
중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 브랜드는 무려 200개 이상(이 중 전기차 브랜드 137개). 치열한 생존 경쟁이 이어지면서 탈락자가 속출합니다. 혼다의 프리미엄 브랜드 ‘어큐라’와 일본 미쓰비시는 2023년 이미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고요. 가오허자동차(高合汽车), 허추앙자동차(合创汽车), 티엔지자동차(天际汽车) 같은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이 지난해 문을 닫았습니다. 지리자동차와 바이두의 합작사로 주목받았던 지위에자동차(极越)도 12월 갑자기 사업 축소를 발표했고요. 사실 그 많은 중국 전기차 제조사 중 연간 흑자를 내는 기업은 BYD와 리오토 정도이죠. 이제 ‘다음에 망할 전기차 스타트업은 어디일까’ 명단이 돌고 있습니다.
살아남았지만 적잖은 타격을 입은 제조사도 많습니다. 현대차는 지난해 1월 베이징현대 충칭공장을 20% 할인된 가격에 매각했고요. 혼다와 닛산은 중국에서 일부 공장 폐쇄와 대규모 해고를 진행했죠.
제품에 자신 있으면 가격경쟁 따윈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독일 고급차 브랜드 BMW도 그렇게 생각한 적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7월 가격할인을 멈추고 정가로 되돌렸죠. 그러자? 8월 판매량이 곧바로 반토막 났습니다. 불과 한 달 만에 BMW는 다시 가격 할인 전쟁터로 돌아와야 했죠. 누구도 이 가격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승자 없는 싸움
난립하던 완성차 브랜드가 경쟁 끝에 도태되고 일부만 살아남는 건 사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때 전 세계에 700개 넘는 브랜드가 난립했던 스마트폰 시장도 그런 과정을 거쳤으니까요. 컨설팅업체 알릭스파트너스에 따르면 중국 전기차 브랜드 137개 중 10년 안에 이익을 낼 만한 곳은 19개뿐. 나머지는 사라지거나 통합될 운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무지막지한 가격경쟁의 여파가 완성차 제조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난해 11월 BYD 임원이 협력업체에 보낸 e-메일 내용이 공개돼 화제였죠. 자동차 시장이 ‘녹아웃 매치’이자 ‘결정적 전투’로 접어들었다면서 2025년 부품 가격의 10% 인하를 요구한 겁니다. 이어 중국 국유 자동차 제조사 상하이자동차(SAIC) 역시 협력사에 10% 부품가 인하를 요청했단 보도가 이어졌는데요.
물론 완성차업체가 협력업체를 쥐어짜는 거야 연례행사이긴 합니다. 다만 과거엔 해마다 3~5% 정도 깎았다면 이젠 인하 폭이 더 커진 데다, 연간 2~3회 가격 인하 요구도 비일비재하다고 하죠. 하지만 이미 보쉬·ZF·발레오·브로제 같은 자동차 부품 대기업들까지 지난해 중국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에 나섰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협상력이 약한 중소 공급업체는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고요. 한 부품업체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확실히 프로젝트에서 돈을 잃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잃지 않고는 프로젝트를 따낼 수 없으므로 악순환입니다.”
만약 부품가격 인하 폭이 생산효율성을 높여서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면 어떻게 할까요. 결국 남은 방법은 재료 등급을 낮추는 겁니다. 납품가 인하 요구를 받은 1차 협력업체가 2차 협력업체의 납품가를 깎고, 2차 협력업체가 다시 3차 협력업체에 이를 전가하면, 결국 3차 협력업체는 더 싼 원자재를 찾을 수밖에 없죠. 이는 완성차의 품질 하락으로 결국 이어질 겁니다. 차값이 떨어지는 만큼 소비자는 보이지 않는 비용을 지불하는 셈이죠.
이렇게 차값이 계속 떨어지면 소비자엔 이익일까요. 생각보다 중국 소비자들은 자동차 가격전쟁에 시큰둥합니다. 매켄지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소비자 중 80% 이상은 가격인하가 자동차 구매 결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괜히 차를 서둘러 샀다가 가격이 더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굳이 지금 살 이유가 없는 거죠. 최신 차량에 장착되는 옵션 패키지를 사고 싶은 생각도 줄어듭니다. 기다리면 고가의 운전보조 기능도 공짜로 장착될 가능성이 크니까요. 무엇보다 차를 샀는데 제조사가 파산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입니다. 자동차 업체가 망하면 그 브랜드 차량 소유자는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까요.
완성차 업체, 부품 공급업체, 자동차 소비자. 현재까진 셋 중 누구도 승자가 아닌 이상한 전쟁이 이어지는 중입니다.
정부가 “전면 시정” 외쳤지만
이 가격전쟁, 이대로 둬도 될까요. 보다 못한 중국 정부가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12월 열린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이런 문구가 나왔죠. “‘퇴화적(内卷) 경쟁’을 전면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시장의 과도한 가격경쟁을 바로잡기 위한 정부 차원의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극단적인 가격경쟁이 기술 혁신과 산업 발전을 되레 저해한다고 보기 때문인데요.
물론 정부는 어느 산업이 타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게 자동차 산업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죠. 중국 지리자동차의 리슈푸 회장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 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악하고 퇴화적인 경쟁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가격전쟁 대신 기술혁신, 품질, 브랜딩, 서비스, 기업 윤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중국 자동차 업계의 가격경쟁 ‘휴전’ 약속은 이전에도 있었다가 쉽게 깨지곤 했죠. 이번엔 과연 무슨 수로 이를 막을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다만 중국 업체 간 극단적인 가격전쟁이 괴멸적인 결과로 이어진 ‘퇴화적 경쟁’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산업이 오토바이인데요.
예나 지금이나 동남아시아는 오토바이 천국이고, 그 시장을 지배하는 건 일본 브랜드이죠. 그런데 잠깐 중국산 오토바이가 이 시장에서 일본 브랜드를 제친 적이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이었죠.
당시 혼다, 야마하 같은 일본 브랜드 오토바이는 동남아에서 약 2000달러에 팔렸는데요. 그 절반 가격인 중국산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베트남의 경우 1999년 기준으로 진출한 중국 브랜드만 20개 이상. 압도적인 가성비 덕분에 중국 브랜드는 일본산을 밀어내고 금세 베트남 오토바이 시장의 80%를 차지합니다.
그리고도 가격전쟁은 계속됩니다. 중국 업체끼리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 거죠. 100cc짜리 오토바이 가격이 1000달러에서 800달러로, 그리고 다시 500달러까지 떨어집니다. 가격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베트남 오토바이 평균 판매가가 매달 70달러씩 하락했단 기록이 있을 정도이죠.
그리고 가격과 함께 당연히 품질도 떨어졌습니다. 싸구려 중국산 오토바이는 잔고장이 잦은 데다 2~3년만 지나도 대수리가 필요했고, 4~5년이 되면 폐차할 지경이 됐습니다. 일부 브랜드가 애프터서비스를 등한시하면서 중국산에 대한 이미지는 급속히 나빠졌죠. 결론은 중국 브랜드 모두의 패배. 그 사이 중저가 신형 모델+대출 상품을 내놓은 일본 브랜드가 품질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다시 시장을 휩씁니다. 이제 동남아 시장 점유율은 혼다 67%, 야마하 22%. 중국산은 1%에 그칩니다. 품질마저 희생하는 극단적인 가격경쟁의 처참한 결말입니다. 중국 자동차 업계가 20여 년 전 오토바이 시장의 교훈을 최근 다시 곱씹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By.딥다이브
자동차 산업이 원래 이리도 다이내믹한 것인가요. 중국 시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가 없기 때문에 더욱 중국 상황을 예의주시해야겠습니다. 마침 2일(현지시간) 테슬라의 연간 인도량이 13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는 뉴스가 눈길을 끕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중국 자동차 업계의 ‘가격전쟁’이 점점 더 심화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엔 테슬라 모델Y가 또다시 가격을 할인하고, 혼다 시빅이 10만 위안 이하로 팔려서 업계를 놀라게 했죠. 새해 들어서도 BYD가 할인 공세를 이어갑니다.
-자동차 업계의 수익률이 악화하고, 적자가 불어난 전기차 스타트업 파산이 이어지고, 해외 브랜드 합작사가 철수하고 있습니다. 잔혹한 탈락전인데요. 제아무리 고급 브랜드라고 해도 가격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여파는 자동차 공급업체로 이어집니다. 완성차 업체의 납품가 인하 요구에 시달리면서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죠. 이는 결국 제품 품질 하락으로 이어질 게 뻔하다는 점에서 산업 전체엔 마이너스입니다. 그 비용은 결국 소비자에 돌아가는 셈이죠.
-보다 못한 중국 정부가 “퇴화적 경쟁을 전면 시정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혼란을 무슨 수로 정리할까요. 20여 년 전 동남아 오토바이 시장의 교훈이 되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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