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석학 인터뷰] 〈2〉 국제정치경제학 석학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교수
무역-자본 개방 강요한 초세계화… 극우세력 등장-심각한 양극화 불러
글로벌 공급망 여전히 중요하지만… 핵심 영역에선 ‘높은 울타리’ 필요
트럼프는 ‘학교 불량배’ 다루듯해야… 한국 최근 정치 혼란에 전세계 놀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학교 운동장의 불량배(schoolyard bully)’를 다루듯 관리해야 한다. 그는 특정 사안에 오래 집중하지 않을 때가 많다. 트럼프 당선인의 발언과 행동 하나하나에 과잉 반응하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한국의 우선 순위에 집중하라.”
세계화 열풍이 불던 1990년대부터 ‘세계화의 한계’를 주장해 온 국제정치경제학 분야의 석학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 교수가 지난해 12월 말 동아일보와의 신년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로드릭 교수는 최근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극우 정당의 득세와 보호무역주의 움직임에 대해 “(인위적으로) 무역과 자본의 개방을 강요했던 ‘초세계화(Hyper-Globalization)’의 폐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초세계화가 균열과 양극화를 낳았고 이에 대한 각국 유권자의 반발과 거부감을 이용해 각국의 극우 세력이 힘을 얻었다는 의미다. 그는 “이제 각국은 자국의 핵심 영역을 강하게 지키는 ‘작은 마당, 높은 울타리’ 전략을 추구할 것”이라며 “한국도 어떤 정책을 마련할지 자체적으로 판단해 대비하라”고 조언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곧 취임한다. 국제통상 측면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트럼프 당선인은 그간 관세에 대해 계속 말해 왔다. 그가 더 높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해도 이제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다만 트럼프 2기 행정부에 합류할 사람들 중에는 관세를 덜 선호하는 이도 많다. 이들은 무역 상대국으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 수단으로만 관세를 생각한다. 그래서 최선의 경우에 트럼프 당선인의 높은 관세 위협은 ‘빈말(empty threats)’로만 끝날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엔 정말로 높은 관세가 부과될 수도 있다.
그때 미국의 무역 파트너들은 보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냉정하게 반응하며 협상에 나서야 한다. 무분별한 관세 부과는 대부분 자국 경제에 해를 끼친다. (미국이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고 해서) 다른 국가들도 보복 관세로 문제를 악화시킬 이유가 없다. 그건 자신의 발등을 찍는 일이다. 트럼프는 그냥 트럼프 식대로 하게 둬라(Let Trump be Trump).”
―한국도 관세 부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무엇보다 트럼프 당선인의 발언과 행동에 과잉 반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트럼프 당선인이 미국의 편을 들라고 압박하더라도 한국은 미국의 룰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모든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트럼프 당선인은 특정 사안에 오래 집중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 점을 잘 이용해야 한다. 한국을 포함해 미국의 무역 파트너들은 인내심을 갖고, 마치 학교 운동장의 불량배를 다루는 것처럼 그를 관리하면서 자국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사항들에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하고 싶다.”
로드릭 교수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스페인 엘파이스, 인도이코노믹타임스 등 각국 주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얇은(thin) 세계화’, ‘다극주의’ 등을 초세계화 이후 시대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개별 국가에 ‘국제 표준 모델’을 압박하는 기존의 세계화에서 벗어나 각국이 자국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취지다. 특히 그는 한국 일본 대만 등은 세계 경제에 통합되는 동시에 고도의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며 ‘얇은 세계화’와 ‘자국 우선주의’가 양립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한 사례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한국은 최근 정치 혼란을 겪고 있다. 더 큰 도약을 위한 경제·산업 정책도 잘 보이지 않는다.
“최근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다만 한국 국민의 대응은 그야말로 모범적이었다.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최근에 민주주의를 이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 모습이 더욱 돋보였다. 한국이 미국 등 세계의 무역 파트너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번영하는 경제’와 ‘통합된 사회’다. 이 두 개는 모두 한국 안에서 이뤄 내야 하는 목표다. 이를 달성할 가장 좋은 방법 또한 한국이 판단해야 한다.”
―여러 저서와 기고에서 일찌감치 세계화의 문제점과 폐해를 지적했다. 1990년대만 해도 소수 의견이지만 이젠 당신이 맞았다는 평가도 많다.
“‘초세계화’는 각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자국의 경제나 사회적 목표 달성에 앞서 무역과 자본의 개방을 우선시하도록 요구했다. 이로 인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경제적 승자와 패자 사이에 심각한 균열과 양극화가 생겨났다. 양질의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 불안을 겪는 지역과 노동자들이 생겨났지만 정치 엘리트들은 이들의 어려움과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다. 최근 각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권위주의적인 극우 세력의 등장과 영향력 확대는 이러한 정치적 반발을 이용한 것이다. 초세계화는 결국 그 자체가 가진 취약성과 지속 가능성의 한계 때문에 약화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계 경제와 글로벌 공급망은 너무나 깊이 연결돼 있다. 보호무역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맞다. 글로벌 공급망은 여전히 중요하고 여기서 큰 붕괴가 있으리라 보진 않는다. 약간의 지역화(regionalization)가 일어나고 중국과 서구 간에 더 큰 분리가 일어날 수 있겠지만 세계 무역의 심각한 붕괴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언급했던 ‘작은 마당, 높은 울타리’ 원칙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국가가 안보나 특정 핵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분야에서는 좁은 마당에 높은 울타리를 치듯 자국의 영역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나는 이 원칙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단, 그 조치는 명확하고 투명한 이유에 근거해 선택돼야 한다. 또 경제 활동의 매우 좁은 범위에 한정돼야 할 것이다.”
―미국이 그간 ‘작은 마당, 높은 울타리’ 원칙을 잘 지켰다고 보나.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이 원칙을 충실히 따랐는지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이 재집권한다면 그 원칙이 더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마당, 높은 울타리’ 원칙은 중요하다. 각 나라가 자국의 근간에 관련된 이익을 지키려면 정책 자율성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마당’이란 표현은 이 ‘울타리’가 명확한 목표 아래 선별적으로 취해져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은 무역 분쟁에서 중국 공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세계화는 미국이 주도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체제의 가장 큰 승자는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모든 나라가 무역과 자본의 개방성을 요구하는 초세계화의 규칙을 따를 때 홀로 자체적인 경제 정책을 운영하며 무역 보호, 보조금 지급 같은 산업 정책, 자본 통제, 환율 관리 등을 실행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를 통해 단순히 서구의 경제적 경쟁자를 넘어 지정학적 경쟁자가 됐다. 이제 서구 전체의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의 미중 관계를 어떻게 예측하나.
“트럼프 당선인은 정말로 예측 불가능한 인물(a wild card)이다. 그가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안정시킬 수도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중국을 세계 무대에서 고립시키겠다는 명확한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은 중국에 대해 훨씬 ‘거래중심적(transactional)’인 접근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 그가 자신의 즉흥적 판단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양국 관계 또한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로드릭 교수는 지난해 11월 비영리매체 ‘프로젝트신디케이트’ 기고에서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이 모두 축소되고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튀르키예, 나이지리아 등 6개 중견국이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다극체제를 예상했다. 많은 중견국이 미국 혹은 중국의 절대적인 우방으로 분류되기를 거부하는 만큼 각자 고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며 다층적인 통상 및 외교관계를 구축할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 경제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세계가 다시 초세계화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본다. 세계 경제의 개방성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각 나라가 자체적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도전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정책적 자율성을 폭넓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경제 민족주의(economic nationalism)’의 부활을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물론 일부 형태의 경제 민족주의가 해로울 수 있지만 상호 이익이 될 수 있는 형태도 많을 것이다.”
대니 로드릭
△ 1957년 튀르키예 이스탄불 출생 △ 1979년 미국 하버드대 졸업 △ 1985년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 컬럼비아대 등 교수 역임 △ 2021∼2023년 국제경제학회(IEA) 회장 △ 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국제정치경제학 교수 △ 주요 저서: ‘세계화는 너무 멀리 간 것일까’(1997년), ‘세계화 패러독스’(2011년), ‘그래도 경제학이다’(2015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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