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스놉 엘리트’의 세상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9월 2일 18시 51분



“넌 이담에 엄마처럼 일을 할거니, 집에서 살림을 할거니?”
어느날 딸에게 물었다. 딸은 망설이지도 않고 말했다.
“난 부자한테 시집갈거야.”
뭬야? 나는 놀라움을 감추고 물었다.
“네가 집안이 좋으니, 얼굴이 예쁘니, 아니면 머리가 좋으니? 무슨 수로 부자한테 시집갈건데?”
딸은 잘난 척하며 대답했다.
“난 귀엽거든.”
그 애는 지금 중1이다.
내 딸만 발칙한 줄 알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들어보니 부자와 결혼하겠다는 건 보통이었다. ‘사회지도층’ 아빠와 ‘귀족’ 엄마를 둔 덕에 ‘타고난 공주’인 요즘 아이들은 남자친구가 못생긴 건 봐줘도 돈 없는 건 못 참는다. 사랑하므로 남자 하나 보고 결혼한다는 생각은 입력돼 있지 않다.
▼세상은 속물이 지배한다▼
일 때문에 서울대 사범대생들과 자주 접하는 한 친구는 예비교사의 최고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돈을 ‘마않이’ 버는가라고 했다. 대학에 따라 과외비 수입이 달라지는 등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그들은 이미 가정-교육-직업-수입-파워-지위로 이어지는 세상의 이치를 깨친지 오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올해 서울대 신입생 통계를 보자. 서울과 광역시 수도권 출신이 열명 중 일곱명이 넘는다. 열명 중 일곱명이 과외지도를 받았다. 꼼꼼히 가르치지 않는 ‘이해찬식’ 열린 교육은 과외할 능력이 있는 집 자제들이 명문대에 들어갈 가능성을 훨씬 높여놓았다. 또 아버지가 대졸 이상이 열명 중 일곱명이고, 네명은 경영관리직 전문직에 종사하는 등 중상류층 집안에 살고 있다.
즉 부모의 절대적 지원을 통해 일류대학을 다닌 사람들이 같은 계층과의 결혼으로 더 잘난 자식을 낳아 기르는 계급의 대물림을 어린 나이에 진작 간파한 것이다.
이 영악한 세대의 미래를 나는 전 총리서리들의 청문회에서 보는 것 같았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혼자만 지목돼 억울하다는 듯 그들은 몰랐다, 고치겠다며 버텼다. 청문회 뒤 ‘남들’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지도층의 도덕성 부재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들 집단을 사회지도층이라고 부르지 말라. 그들은 우리를 지도한 적이 없다. 상류층 귀족이라고도 하지 말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없는 자는 결코 귀족이 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속물일 뿐이다. 돈을 벌거나 출세를 하거나 공명을 떨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속물이되, 이미 돈을 벌고 출세를 하고 공명을 떨친 축에 속해 있는 잘난 속물, 즉 ‘스놉 엘리트(Snob-Elite)’다. 조지프 엡스타인이 최근 미국서 내놓은 저서 ‘속물근성(Snobbery)’에서 파헤친 현상이 세계화 물결을 타고 우리나라에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거다.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층없는 사회는 없다. 문제는 우리사회의 스놉 엘리트들이 그 속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수시로 약올리고 절망시킬 뿐만 아니라 발목까지 잡는데 있다.
서울대 지역할당제나 영어 공용화의 반대 논리도 발목잡기 음모의 예다. 가만히 보면 대체로 서울 등 대도시에 살면서 영어를 썩 잘하거나 자식을 외국에 유학 보냈거나 그에 준하는 교육을 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제도를 반대한다. 그럴듯한 명분을 대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아무나 서울대 브랜드와 영어구사력을 갖추고 엘리트의 밥상에 뛰어드는 걸 원치 않는다.
이제 스놉 엘리트들에게 전 총리서리 사건의 교훈을 잊지 말고 도덕성 재무장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마무리하면 나는 쉽다. 하지만 의미없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백번을 촉구해도 그들은 절대 안 듣는다. 그게 엘리트의 힘이다.
▼제발 발목은 잡지 마라▼
정작 걱정해야 할 대상은 가슴 속에 속물근성은 가득한데 도저히 엘리트가 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그들만을 위한 프라이빗 뱅킹-당신께는 죄송합니다’(CHB) 같은 광고를 보며 열받는 당신에게 이 험한 세상을 사는 방법을 감히 조언한다면 첫째, 목숨걸고 애써서 엘리트 집단에 끼어드는거다. 명문대 입학과 스포츠 성형수술 결혼 등 역전의 기회는 특히 놓쳐선 안 된다.
둘째, 깃털의 처세술을 익혀 몸통 아래서 단물을 받아먹으며 살기다. 셋째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어떤 일에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가장 아름다워 보이지만 엡스타인에 따르면 이게 제일 어렵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게 남아 있다. 스놉 엘리트들의 음모론에 속아선 안 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세제개편을 하고, 대입제도를 바꾸고, 공정하게 징병검사를 한다고 해도 덫에 걸려드는 건 결국 지극히 힘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속물 맞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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