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그래도 한국이 고맙다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7월 2일 18시 07분


생뚱맞은 소리라는 거 안다. 보통사람은 지갑 열기가 겁나는데 잘난 국회에선 감투싸움이나 해대고, ‘우왕좌왕 여권’은 도덕적이지도 않다는 게 드러났고, 새 사람이 될 줄 알았던 대통령은 보란 듯 본모습을 강조하는 판에 그래도 한국이 고맙다니?
살기 힘들 때 나보다 못한 쪽을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는 게 ‘패자의 철학’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라가 싫다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어떻게든 살아야 할 사람이 더 많다. 국내뉴스처럼 매스컴을 차지하는 이라크를 보면 이 작은 땅에서 이만큼 사는 것이 다행이다 싶어진다.
▼땅·사람·제도의 相扶相助▼
한국이 고마운 첫 번째 이유는 땅이 도와준다는 거다. 석유가 없어서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설자인 후안 파블로 페레스 알폰소는 ‘악마의 배설물’이 석유라고 했다. 캐내려면 막대한 자금과 기술이 필요한 게 석유의 고약한 특징이다. 경제가 발전된 상태에서 제 땅의 석유를 꺼내 쓰기 시작한 미국과 달리, 가난한 중동과 북아프리카 남미에선 있는 석유를 내다 팔려 해도 외국도움이 필수다. 독재와 부정부패, 극심한 빈부격차가 이 과정에서 나온다. 정권과 이권을 뺏으려는 내란은 단골이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자원이 많을수록 되레 더뎌진다고 했다. 돈이 절로 굴러오니 정부가 세금 잘 걷기 위해서라도 법과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1960년부터 30년간 자원부족국가의 경제발전속도가 자원부자나라보다 2∼3배 빨랐다는 오픈 소사이어티 연구소의 조사결과도 있다.
전쟁의 주요 원인도 석유다. 걸프전과 이라크전에 미국의 안정적 석유확보 목적이 있다는 점을 부인 못한다. 석유 없는 우리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장애물도 없고 전쟁을 불러들일 요인도 없는 셈이다.
한국이 고마운 둘째 이유는 사람이 돕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이념 계급 지역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한대도 우리나라에 무장 테러리스트는 없다.
치안 걱정 안한다는 게 지극히 당연해 뵈지만 온갖 시위가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폭탄 안 터지고 테러목적의 납치 살해 없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라크 주권정부의 성공기준도 다름 아닌 치안이다. 전기와 물과 일자리가 부족한 것도 불안한 치안 탓이 크다. 전력공급을 맡은 외국기업 직원들이 이라크를 떠나고, 물은 테러리스트가 독극물을 넣을까봐 못 들여오고, 송유관 폭파로 석유생산이 불안정하니 돈도 일자리도 떨어지는건 당연하다.
치안 없이는 재건도 없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이 오히려 테러를 확산시킨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라크의 무장 세력도 이상하다. 사실상 미군점령이 계속된다지만 테러로 피해보는 건 제 나라 제 백성이다. 테러리스트가 꿈꾸는 ‘탈레반 이라크’가 세워지면 또 다른 사담 후세인이 등장할 뿐이다. 그들이 떠받드는 민족주의와 이슬람도 사익(私益)을 감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그러고 보면 광복 후 우리나라가 미군정과 함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맞은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분단은 가슴 아프지만 옛 소련에 점령돼 공산주의를 덮어쓴 것보다는 천 번 낫다. ‘우리끼리 잘살자’면서 제 국민을 굶겨 죽이고, 정권 지키겠다고 핵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을 보면 안다.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제도 자체는 이 나라를 돕고 있다는 얘기다.
▼3년 반 사이에 망할 리 있나▼
이 좋은 조건에서 남들은 다 비약하는데 우리만 죽 쑤고 있다는 건 분한 일이다. 게다가 우리 속에 있는, 이라크 못지않은 불안요인이 방치되는 것도 심각하다. 석유보다 위험한 북핵을 이고 있는데도, 무장 테러리스트처럼 과(過)한 비무장 데모꾼들이 경제 발목을 잡는데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능멸하는 전염병이 도는데도 그냥 바라보기만 하다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줄지 두렵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전쟁도 이겨냈고 독재와 권위주의적 정권도 견뎌낸 우리다. 스스로를 믿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유별난 정부라도 3년반 안에 나라를 결딴낼 만큼 유능하진 않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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