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미국인은 바보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11월 5일 18시 02분


“청소기가 나왔어도 찍었을 텐데 부시가 당선되다니….”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지각 있는’ 세계인들은 충격에 빠진 것 같다. 조지 W 부시 재선 반대 운동을 편 영국의 진보적 신문 ‘가디언’은 “미국엔 단순무지한 네안데르탈인이 산다”고 했을 정도다. 35개국에서 존 케리 후보가 뽑히기를 바란 이가 46%, 부시 재선을 원한 이는 20%뿐이었다니 그럴 만도 하다.
미국인의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건 경제(20%)도, 테러(19%)나 이라크전(15%)도 아닌 도덕적 가치(22%)였다. 그것도 낙태, 동성결혼, 줄기세포 연구 등 남들한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핵심이다. 부시의 ‘이상한 전쟁’ 때문에 괴로워하는 딴 나라 눈엔 기이할 수밖에 없다.
▼‘세계의 중심’은 강경 보수로▼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테러와의 전쟁에서 비롯된 이라크전의 심각성을 모르는 경우다. 두 달 전 메릴랜드대 조사에서 “사담 후세인과 알 카에다가 연관된 증거가 있다”는 응답이 49%일 만큼 미국인은 현실에 어둡다.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세계가 이라크전을 지지한다고 믿는다. 특히 정부편향적인 폭스뉴스채널을 볼수록 착각 속에 산다. 그들에겐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다. 적잖은 나라가 비난하는 부시의 일방주의도 미국에선 당연할지 모른다.
또는 미국인은 먹고사는 것보다 사람답게 사는 걸 중시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단, 미국경제가 아무리 어렵대도 웬만한 나라보다 잘산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남미에선 ‘경제만 해결되면 독재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다. 살기 힘들면 그렇게 된다.
미국인에게 도덕적 가치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미국의 탄생에서 찾을 수 있다. 왕정국가의 억압을 피해, 종교의 자유와 풍요를 찾아 신대륙에 온 청교도들은 스스로 도덕적 십자군이라고 여겼다. 뿌리가 없는 DNA 탓에 지금도 종교는 삶에 안정을 주는 주요 부분이다. ‘악의 축’과 ‘십자군전쟁’을 벌이는 부시가 이상해 보일 리 없다. 신에게서 선택받은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하는 ‘윌슨주의’를 실천할 뿐이다.
때마침 전신마비환자였던 ‘슈퍼맨’의 죽음은 줄기세포연구 논란에 불을 댕겼다. 엄격한 기독교인이 보기엔 줄기세포도, 태아도 신이 준 생명이다. 이를 없애겠다니 미국이 ‘소돔과 고모라’로 변하는 건가. 2000년 대선 때 부시의 음주운전 과거에 실망해 투표장도 안 갔던 400만 교인들이 궐기했다. 동성애에 관대한 리버럴(자유주의자)로부터 박해받고 있다고 믿는 그들이다. 미국의 예외성을 외면하고 국제협력을 강조하는 엘리트에게 조국을 맡길 순 없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확인된 미국의 도덕적 가치는 보수주의다. 자신을 보수로 여기는 애국자가 4년 전 29%에서 올해 33%로 늘었다. 애초 조세저항에서 국가를 탄생시켜 정부권력을 최대한 제한해 온 미국인은 태생부터 우파이긴 했다. 더 보수적이 된 국민이 자신과 비슷한 대통령을 선택한 것이다. 사유재산 불리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세금 걷어 복지에 쓰는 정부 싫어하는 그들 이익엔 부시가 맞았다. 이런 심리를 간파한 부시측이 도덕적 가치를 선거전략으로 이용한 건 물론이다.
▼리더는 국민 수준과 일치한다▼
어쩌면 세계는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부시 아닌 케리가 당선되면 오만한 일방주의가 사라지고 평화시대로 들어설 것으로. 미안하지만 케리 대통령이 나왔어도 보수의 바람을 거스르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투표로 뽑힌 한 나라의 리더는 다수 국민의 수준과 여망을 정확히 반영한다는 사실을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이 확인해 준 셈이다.
사람은 각자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향해 움직인다. 미국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간과한 게 있다면 어떤 가치든 개인이 추구할 일이지 국가가 할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리더의 가치를 모두가 따라야 하는 곳은 종교집단이거나 독재국가다. 다행히 부시는 케리 후보 지지자들에게 다가가겠다고 밝혔다. 비슷한 얘기는 우리도 들은 적 있다. 행운을 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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