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아리랑’ 말고 밀양이 이렇게 유명해진 적이 또 있나 싶다. 인터넷 포털의 아무 데나 들어가 ‘밀양’을 치면 성폭행 사건과 관련된 사이트가 줄줄이 뜬다. “피해자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해 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글도 있고, 밀양 주민들은 기막히겠지만 “밀양엔 절대 안 간다”는 글도 적지 않다. 호주에 산다는 한 누리꾼(네티즌)은 밀양경찰서 자유발언대에 이렇게 썼다. “딸들 있으신지요. 딸이 없으시더라도 아내는 있으시겠지요…성폭행 조사하신 분들의 딸이나 아내가 그런 식으로 취급받으면 좋으시겠어요?” ▼총체적 모순 드러낸 성폭행사건▼ 어린 여학생이 1년 넘게 일을 당하면서 부모에게도, 교사에게도 말을 못했다니 어른들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 없게 생겼다. 이번 사건이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행위 사건 못지않게 우리 사회의 총체적 모순과 치부를 드러냈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숙한 청소년들의 빗나간 호기심부터, 테크놀로지와 체격 발달을 못 따라가는 교육, 아들 가진 부모와 딸 가진 부모의 엇갈린 자식사랑, 그리고 성에 대한 이중적 인식까지 낱낱이 노출됐다. 그중에서도 우리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피해자에게 폭언을 퍼부으면서 가해자에게는 턱없이 관대했던, 성폭행사건을 조사하고도 노래방 ‘도우미’를 찾았던, 성인 남녀의 자유의사에 따른 성매매엔 강경하면서 10대의 윤간은 대충 넘어가려 했던 관(官)의 행태였다. 누리꾼들의 서울 광화문 촛불시위도 이런 울분에서 나왔다. 약한 딸도 보호해 주지 못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자식을 키우란 말인가. 한글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각자 깨쳐야 하는 국가다. 가뜩이나 늦은 시간, 학원에서 조금만 늦어져도 엄마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다. 과외선생 구하듯 보디가드까지 붙여 줘야 하는 시대가 올지 모를 일이다. “내 딸은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했다는 피해자 부모의 기사를 보니 딸 둔 입장에서 가슴이 아팠다. 만일 내 딸이라면, ‘그건 폭력일 뿐이다. 다친 데 있으면 치료받으면 되지 그것 때문에 죽은 목숨일 순 없다. 너는 네 몸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말해 줄 것 같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것도 모순이다. 강간범에게 ‘그대는 단순한 폭력범일 뿐’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2세대 페미니즘을 이끌었던 1970, 80년대 미국의 여성학자들이 ‘강간이란 여성을 욕보이려는 남성권력의 남용’이라고 한 것과 비슷한 논리다. 심정적으론 동의하고 싶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너무 나갔다. 강간은 분명 성 때문에 저지르는 범죄다. 폭력보다 중한 죄인 건 남자와 여자가 우열과 상관없이 서로 ‘달라서’다. 여자는 임신할 수 있는 몸을 갖고 있다. 자식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기 위해 좋은 아버지를 선택할 권리가 여자에겐 있다. 그게 성적 자기 결정권이다. 강간은 이를 박탈한다. 그래서 성폭행을 당한 여자는 그냥 폭행을 당한 남자보다 더 고통스러워한다. 강간이 엄벌에 처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검찰총장이 밀양사건을 원점에서 다시 조사하고, 대검찰청이 성폭력 피해 전용조사실을 확대하도록 했다니 뒤늦게나마 다행스럽다. 양성평등 사회가 강조되고 여성학이 세를 얻으면서 성에 대한 남녀 차이도 무시되는 경향이 보인다. 그러나 세계 평화를 약속했다고 국군을 없앨 수는 없듯, 양성평등 교육이 인간본성을 바꾸거나 강간을 없애기는 힘들다는 게 원체 비관적인 필자의 생각이다. 오히려 성적으로 엄격했던 시대보다 자유분방해질수록 강간 발생률이 높아지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진다. ▼국가는 약자, 여자는 각자 보호를▼ 안타깝지만 이럴 때 내 딸을 키우는 방법은 철저하게 위선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양성평등 세상을 논하는 모임이라도 술에 취하거나 너무 늦기 전에 빠져 나올 것이며, 여관 앞에서 “오빠 믿지?” 하는 남자를 믿는 대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쪽을 단호하게 선택하도록 가르치는 게 낫다. 여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남녀가 똑같은 몸과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아는 점 역시 중요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밀양이 피해자 보호의 새 지평을 연 곳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