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②정치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③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④언론자유를 포함해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성향이 있는지 등 네 가지 기준이다. 이 중 한 가지라도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면 위험한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네 개 다 걸렸다.
미국서 1년 전, 우리나라에선 석 달 전 출간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리트머스 테스트를 본 순간, 조건반사처럼 우리 상황이 떠올랐다.
①“국민들의 헌법의식이 곧 헌법이다. 헌법재판소가 탄핵 기각을 결정하면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헌법을 부정하거나 집권을 위해 쿠데타나 폭동을 지지하는 건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한다는 의미다.
②“우리 정치의 주류세력들을 교체해야 한다.”=경쟁자나 정당의 법률 위반(혹은 위반 가능성)을 문제 삼아 정치무대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경쟁자의 존재 부정이다.
③“민주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정부가 집회·시위를 탄압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공권력과 시민이 충돌하는 일이 번번이 벌어진다.”=폭력에 대한 비난이나 처벌을 부정하는 건 폭력을 방조, 용인, 조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④자신에 대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고영주 방송문화진흥원 이사장을 2015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상대 정당이나 언론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는 것만으로도 경고등은 번쩍인다(고영주는 2017년 말 이사장 자리에서 해임됐지만 1심 재판부는 2018년 무죄를 선고했다. “이 같은 주장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는 공론의 장에서 논박을 거치는 방식으로 평가돼야한다”면서).
타는 목마름으로 불렀던 민주주의
민주화운동에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우리 대통령이 잠재적 독재자 성향을 지녔다고 믿고 싶진 않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세계적으로 떠오른 것이 신(新)권위주의 지도자다.
헝가리 총리 빅터르 오르반처럼 이들은 민주화운동 경험이 있고, 합법적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냉전시기, 민주주의 전복의 75%가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투표장에서 이뤄진다). 부패를 척결하고, 과거 엘리트 기득권세력이 만든 법과 제도를 변혁해 지지자들은 열광을 한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 싶은가. 민주주의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저들이 한때 타는 목마름으로 불렀다는 그 이름, 민주주의가 바로 저들의 손에서 소프트하게 목 졸리고 있기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삼권분립, 법치주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같은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 말이다.
민주주의를 부드럽게 죽일 수 있는 세계적 공식이 궁금한가. 심판 매수! 언론을 시작으로 사법부와 검경, 정보기관, 국세청, 선거관리위원회, 통계청 등의 중립적 기구에 충성스러운 측근을 들여보내 자연스럽게 장악하는 거다.
조해주 선관위 입성, 장기집권 전략인가
대통령이 인사청문회 없이 1월 24일 임명을 강행한 조해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문제가 심상치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작년 4월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의 사퇴를 이끌어낸 것이 선관위였다. ‘5000만원 셀프 기부’는 위법이라는 선관위 판단에 김기식을 임명한 청와대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중차대한 기관의 중책을 맡은 조해주는 2017년 9월 더불어민주당이 발간한 ‘제19대 대통령선거 백서’ 785쪽에 공명선거특보로 명시돼 있다.
물론 본인도, 민주당도 백서 기록은 ‘행정착오’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거백서라는 것은 집권 시 논공행상의 근거가 되는 주요 자료다. 109명이나 되는 정무특보 이름 중 하나가 행정착오로 잘못 들어갔다면 또 모른다.
공명선거특보는 달랑 한명인데 한 일도 없이 이름이 기록됐다는 해명엔, 작년에 먹은 떡국이 올라올 판이다. 만일 다시 김기식 사태가 터진다면 선관위가 같은 판단을 할지 알 수 없다. 더 두려운 것은 이런 무리한 인사를 강행하는 의도가 대체 무엇이냐다.
문재인 정부와 과거 한솥밥을 먹었던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오만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촛불정부는 뭘 하든 정의라는 오만, 2020년 선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면 차라리 낫겠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노상 말하던 ‘20년 집권론’에 이어 최근 “20년도 짧다. 20년을 억지로 하겠다는 게 아니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서 한다”고 밝힌 건 단순한 시건방이 아닌 듯하다. 정교한 장기집권플랜이 작동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심판매수로 합법적 민주주의 죽이기
‘나는 꼼수다’ 등장인물들이 언론계를 누비고 있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까지 색깔이 달라진지 오래다. 이젠 놀라는 사람도 많지 않다. 독립성이 생명인 감사원에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출신 김종호를 사무총장으로 들여보낸 데 이어 감사원-청와대-국무총리실이 공직기강협의체를 상설 운영한다는 데도 조용하다.
앞으로 정부의 외교나 안보, 남북관계나 경제정책에 비판적인 공직자의 성(性)비위가 불쑥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날지 모른다. 청와대 사람들의 비위는 그냥 덮힐 가능성이 크다. 심판 매수가 민주주의 살해 공식이라고 하지 않았나.
쿠데타나 계엄령 선포처럼 독재의 경계를 넘어서는 명백한 순간이 없기 때문에 사회의 비상벨은 울리지 않는다.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장이나 거짓말을 한다고 오해를 받는다.…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설은 그가 민주주의 제도를 미묘하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합법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죽인다는 사실이다(이 마지막 문단은 내가 쓰지 않았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베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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