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오지(5G)’에서 ‘파이브지’로…대통령도 진화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9일 14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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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근무의 매력 중 하나가 남보다 세상일을 좀더 빨리 알 수 있다는 거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고, 늘 그런 것도 아니지만 8일 오전 5G 테크 콘서트를 앞두고 ‘11시 엠바고’를 붙인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말이 나오자 나는 흥분했다.

“이동통신 3사가 상용화 서비스를 시작함으로써 우리는 세계 최초로 5G 상용화에 성공했습니다.” 이 첫줄을 어떻게 읽을지 대통령의 육성을 듣고 싶어 나는 몸이 달 지경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서울 올림픽공원 K아트홀에서 열린 ‘5G+전략발표’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서울 올림픽공원 K아트홀에서 열린 ‘5G+전략발표’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삼디 프린터부터 일관성 있게

대통령선거 전인 2017년 4월 11일 문재인 대선 후보는 5세대 이동통신 기술을 뜻하는 5G를 ‘오지’라고 읽었다. “각 기업은 4차 산업혁명과 지식정보화 사회에 대비, 차세대 오지 통신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주파수 경매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대목에서다.


과거의 실수를 조롱하는 게 아니다. ‘오지 사건’이 주목을 끈 건 문 후보 성격의 일단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향후 전개될 문 정부의 특성을 말해주기도 한다).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오지라고 읽은 것”이라고 후보 측은 밝혔다. 이보다 앞서 열린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그가 4차 산업혁명 관련 공약을 발표하며 3D프린터를 ‘삼디 프린터’라고 읽은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다.

“국가경영자 할 수 없는 심각한 결함”

정치권에선 “잠깐 실수로 잘못 읽었다고 하기엔 심각한 결함”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다 죽어갈 때 살려냈던 김종인은 “국가경영은 3D프린터를 삼디프린터라고 읽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문 후보는 가만있지 않았다. “우리가 무슨 홍길동입니까? 3을 삼이라고 읽지 못하고 쓰리라고 읽어야 합니까?” 트위터를 통해 끓어 넘치는 자주성과 민족주의를 강조한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4월 트위터
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4월 트위터

기자들이 설명을 요청하자 문 후보는 말했다. “과거 청와대에 있을 때도 회의를 하면 새로운 분야, 특히 정보통신 분야는 너무 어려운 외국용어들이 많아 사실 상당히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저는 가능하면 모든 국민들이 알기 쉬운 용어를 썼으면 좋겠다.”

변화와 오류 인정하지 않는 고집

IT 용어가 어렵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랴. 그래도 글로벌 세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버가 세계를 달리는데 우리만 택시 잡지 못해 동동거리는 울화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지 사건’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문 대통령의 (무지한 또는 불충분한) 인식과 함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 그리고 인사 청문회 결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관 인사를 강행하는 오기(傲氣)를 미리 보여주었다.

대통령 취임 뒤 청와대에서 가진 기업인들과의 간담회에서 문 대통령은 KT 황창규 회장에게 “세계 최초로 평창 올림픽 기간 동안 오지 통신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준비는 잘 되느냐”고 물어 작렬하는 뒤끝을 드러내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 청와대 본관 로비에서 황창규 KT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기업인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 청와대 본관 로비에서 황창규 KT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기업인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통령의 인식 변화를 축하합니다

대통령이 후보 시절 5G를 언급한 맥락이 4차 산업혁명 지원 아닌 가계통신비 절감정책 발표였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통신사들이 오지 주파수 경매에 베팅 하는 거액으로 통신비나 확실히 내리라고 주장했던 거다.

그랬던 대통령이 8일 원고에 등장하는 모든 5G를 ‘파이브지’로 읽은 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만일 후보 때 입력된 대로 오지를 고집했다가 미국 버라이즌이 “당신들은 오지이고, 우리는 5G다”하면 어쩔 뻔 했나.



홍길동 식 용어를 넘어서면서 인식도 진화했을 것으로 믿고 싶다. 대통령 인사말대로 5G를 통해 모든 산업의 디지털 혁신이 가속화하면 지금까지는 불가능했던 혁신적 융합서비스로 자율주행자동차, 스마트공장, 스마트 시티 등 4차산업혁명 시대의 대표 산업들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터다.

규제로 묶어놓고 원격진료하라고?

문제는 지금 같은 규제 수준으로는 5G 인프라를 전국에 확산시키기도 어렵다는 사실에 있다.

대통령은 “규제가 신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게 규제혁신에도 더욱 속도를 내겠다”면서도 중저가 요금제 같은 가격정책을 언급했다. 정부가 가격규제를 붙들고 있으면서 기업보고 날아오르라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소리다.

의료, 교육, 교통, 재난관리 분야가 5G기술과 서비스가 가장 먼저 보급될 곳이라고도 대통령은 강조했다. 원격진료나 승차공유, 빅데이터산업이 4차 산업혁명을 외면하는 기득권집단과 이에 영합하는 좌파 정치권의 반대로 꽉 막혀 있음을 알고도 원고를 읽은 건지 안타깝다.

민노총과 ‘공유정부’ 어쩔 것인가

이런 규제가 오지와 함께 없어진대도 해도 더 큰 장애가 남아 있다. 자신들의 철밥통이 위협받는다며 자율주행자동차 생산과 스마트공장 자체를 결사반대하는 민노총 식의 강경투쟁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오지가 파이브지로 바뀐 것이 실수가 아니라면, 써준 대로 그냥 읽은 게 아니고 대통령의 인식이 바뀐 것이라면, 국정운영의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인터넷 플랫폼과 앱 기반의 긱 이코노미 같은 환경변화로 상시 고용이 소멸하는 시대다. 글로벌 경제와 담을 싼 민노총 같은 집단과 사실상 ‘공유정부’를 유지하는 것은 홍길동 시대로의 역행보다 더 위험하다.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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