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영수회담 요구했던 文, 지금은 왜 거부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7일 15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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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출범 3년차. 새로 선출된 제1야당 대표의 당선 연설은 대(對)정부 전면전 선포였다. “경고한다. 민주주의와 서민경제를 계속 파탄 낸다면 저는 박근혜 정부와 전면전을 시작할 것이다.”

2015년 2월 8일 더불어민주당의 전신(前身)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 연설이다. 전쟁을 말했음에도 문 대표는 취임 3주일 후인 26일 언론 인터뷰를 통해 영수(領袖) 회담을 제의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여야가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는 명분이었다.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당선된 뒤 연설을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동아일보 DB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당선된 뒤 연설을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동아일보 DB


그 결과 문 대표는 3월 17일 (여당 대표를 깍두기로 끼워)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도 당 대표 당선된 지 한달 열흘도 안 되어서다!

●그때는 군소정당 끼워주지 않았다

그때라고 군소정당이 없었던 건 아니다. 문재인 청와대의 여야회담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정의당 의석이 6석이다. 박근혜 청와대 때는 5석이었다. 지금과 별 차이 없는데도 그때 정의당은 여야회담에 끼지 못했고, 거대 여야 어느 당도 합석을 주장하지 않았다.

박근혜-문재인의 영수회담 결과가 어땠는지는 접어두자. 당시 문 대표가 영수회담을 제의하며 “일단 대통령과 경제를 위해 만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했듯, 만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동아일보가 다음날 사설에서 ‘국민은 국정의 핵심 파트너인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정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썼을 정도다.

장황하게 돌아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꽉 막힌 정국, 꼭 닫힌 국회를 여는 데는 영수회담이(라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구하고 구차한 청와대-여야 5당 회담 말고, 4년 전 문 대표처럼 대통령과 제1야당이 영수회담을 하기 바란다.

자유한국당을 대접해줄 수 없다?

여야회담 얘기가 나온 지 벌써 한달 째다. 문 대통령은 5월 9일 KBS와의 회견에서 대북 식량지원을 놓고 여야 5당 대표 회담을 제의했다. 다음 날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검경 수사권 조정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논의를 전제로 일대일 단독 회담을 역제안 했다. 청와대가 한국당을 뺀 대통령-4당 회담까지 제안했던 건 파국을 각오한 행태로 보인다. 그리고는 7일 오전까지 5당 대표 회동 후 일대일(청와대), 3당 대표 회담 후 일대일(한국당) 지루한 공방전이다.

지난달 9일 KBS ‘문재인 정부 2년 특집 대담, 대통령에게 묻는다’에 출연한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제공
지난달 9일 KBS ‘문재인 정부 2년 특집 대담, 대통령에게 묻는다’에 출연한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제공


당연히 청와대는 제1야당을 따로 대접해주기 싫을 것이다. 한국당 황 대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당선 뒤 한달 열흘도 안 돼 대통령을 만났던 제1야당 대표 문재인이었다. 그 대통령이 제1야당 대표를 당선 석 달이 넘도록 만나주지 않는 건 공평하지 않다.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는 개구리 같다.

청와대로선 거대 제1야당이 버티고 있는, 촛불민심이 반영되지 않은 20대 국회는 그냥 패싱 할 것을 각오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국회 협조를 얻겠다고 영수회담이든, 5자회담이든 매달릴 이유가 없다. 패스트트랙에 태운 선거법 개정을 통해 21대 국회 지형을 뒤집어 버리면, 자유한국당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정국 파행의 책임이 청와대에 갈수도

그러나 내년 4월 총선까지는 너무 길다. 제1야당의 장외 투쟁을 그대로 두기엔 경제와 안보, 외교가 위중한 상황이다. 영수회담을 하고도 한국당이 장외를 떠돌면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 영수회담을 하지 않는다면 정국 파행의 책임이 청와대로 갈 공산도 크다.

더구나 과거청산을 한대도 기억까지 없앨 순 없는 법이다. 민주당은 야당 시절 줄기차게 영수회담을 주장했다. 설령 기대효과가 나지 않아도 대표 자리를 굳히기 위해, 유능한 경제정당 이미지를 주기 위해 영수회담을 요구했고, 결국은 사실상의 영수회담을 받아냈다.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 8월 김한길 당시 민주당 대표가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을 요구하자 청와대는 여야 대표에 원내대표까지 포함한 5자회담(군소정당 포함이 아니다)을 역제안한 적이 있다.

시청 앞 노숙투쟁을 벌이던 김 대표가 거꾸로 ‘선(先) 양자회담 후(後) 다자회담’을 제안하자 8월 28일 의원 신분의 문재인이 찾아와 영수회담을 촉구한 기록도 남아 있다. “정국이 이렇게 꽉 막혀 있으면 오히려 대통령이 야당 대표에게 ‘만나자’고 거꾸로 요청을 해서라도 풀어야 하는데 야당 대표가 만나서 풀자고 하는데도 거부하는 것은 정말 참 납득하기 어렵다.”(하하)

2013년 8월 노숙투쟁 중인 김한길 민주당 대표(왼쪽)를 방문한 문재인 당시 국회의원. 동아일보 DB
2013년 8월 노숙투쟁 중인 김한길 민주당 대표(왼쪽)를 방문한 문재인 당시 국회의원. 동아일보 DB


靑 눈치만 보는 與, 부끄럽지 않나

결국 김 대표는 9월 16일 여당 대표를 끼운 3자 회동으로 대통령과의 회담을 할 수 있었다. 2015년에도 청와대에선 ‘3자 회동’이라고 언급한 반면 문 대표는 ‘여야 영수회담’이라고 강조하며 대선주자의 위상, 경제정당의 이미지도 굳힐 수 있었다(그래서 청와대가 한국당 대표를 못 만나는 것이라면 치사하다).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영수회담이 성사되도록 역할을 한 점은 중요하다.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앞둔 3·1절 기념식 행사장에서 김 대표가 먼저 대통령에게 “순방 결과를 여야 대표에게 얘기해주길 부탁한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 문 대표가 호응했고 대통령이 “다녀와서 뵙겠다”고 화답해 영수회담이 성사됐다.

대통령의 해외방문은 영수회담의 기회로 활용하기 알맞다. 과거 정부에서 김 대표도, 문 대표도 대통령 순방 후 자리를 함께 했다. 9~16일 문 대통령의 북유럽 순방 전에 황 대표와 영수회담, 아니면 여당 대표까지 낀 3자회동, 그것도 아니라면 황 대표의 제안대로 회동한 뒤 떠난다면 대통령의 발걸음도 가벼울 듯하다.

순방 후라도 좋다. 북한 김정은과의 회동은 어딘들, 어떤 형식인들 마다하지 않으면서 제1야당 대표와의 일대일 만남을 거부한다면 대통령의 정치력은 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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