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조국의 반일 종족주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3일 13시 49분


“우리 국민들은 한일 우호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의연하고 성숙한 대응을 하고 있다”고 했다. 13일 청와대 오찬에서 대통령이 한 말이다. 그러고도 대통령은 전혀 의연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하게 대응했던 조국 전 민정수석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할 게 분명하다. 이런 식이면 인사 청문회는 무력화되고, 앞으로 누가 어디 임명돼도 국민은 무관심해질 것이다(이걸 노린 것 같기도 하다).

조국 전 청와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조국 전 청와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 적어둔다. 명백한 법적 근거도 없이 자국민을 ‘부역·매국 친일파’라는 사람은, 다른 부처라면 몰라도 법무부 장관 될 자격이 없다.

조국은 8월 5일 오전 7시 44분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이하 인용문장으로 요약되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학자, 이에 동조하는 일부 정치인과 기자를 ‘부역· 매국 친일파’라는 호칭 외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 한다…”

●조국은 책을 읽었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이하 인용문장으로 요약되는 주장’이라고 쓴 데 주목하기 바란다. 인용문장은 한국일보 8월 5일자 ‘지평선’의 한 대목이다. 즉 조국은 ‘반일 종족주의’라는 논란의 책을 읽고 ‘구역질나는 내용’이라고 쓴 게 아니라 신문 칼럼을 보고 썼다는 얘기다. 그가 맨 끝에 적은 인용문장은 이렇다.

“필자들은 일제 식민지배 기간에 강제동원과 식량 수탈, 위안부 성노예화 등 반인권적·반인륜적 만행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돈을 좇아 조선보다 앞선 일본에 대한 ‘로망’을 자발적으로 실행했을 뿐이란다…”

물론 책을 안 읽고도 비난할 수 있다(학자라면 그렇게 안 한다). 그 책에 대한 칼럼만 보고 동조 비난할 수도 있다(칼럼 필자는 좋겠다). 조국이 쓴 대로 “시민은 이들을 ‘친일파’라고 부를 자유가 있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曺國(한글로 쓰면 헷갈릴까봐 한문을 썼다)은 그냥 시민이 아니다. 며칠 전까지 대한민국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이었고, 곧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될 것을 본인도 아는 서울대 로스쿨 교수다(페이스북을 쓸 때는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기 전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법률전문가여야 마땅할 사람이 자기가 읽지도 않은 책을 놓고 ‘…로 요약되는 주장’을 공개 제기하는 학자(책의 저자만을 말하는 게 아님에 유의바람)는 물론, 동조하는 정치인과 기자들까지 ‘부역· 매국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건 위험하다. 법무장관이 되면 필시 잡아다 경(黥)칠 사람 같다.

●김낙년 교수도 “수탈 아닌 수출”

‘이하 인용문장’을 쓴 한국일보 필자 역시 미안하지만 책을 꼼꼼히 본 것 같진 않다. 제대로 읽고도 “필자들은 일제 식민지배 기간에 강제동원과 식량 수탈, 위안부 성노예화 등 반인권적·반인륜적 만행은 없었다고 주장한다”고 썼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서술이다.

1939년 9월~1945년 8월 15일 일본에 건너가 노동한 조선인 근로자들을 보통 ‘강제동원’됐다고 한다. 하지만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길게 잡아 1945년 4월까지 8개월간 실시됐다. 그 전의 ‘모집’이나 ‘관알선’은 법률적 강제성이 없었다는 것이다(69쪽).

쌀 수탈 논문은 소득통계 권위자인 김낙년 동국대 교수가 썼다.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했다는 ‘뉴라이트’ 계열 학자가 아니다. “‘수탈’은 강제로 빼앗아 갔다는 것이고 ‘수출’은 대가를 지불하고 구입해 갔다는 것”이라는 김 교수는 “당시의 자료나 신문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쌀은 통상의 거래를 통해 일본으로 수출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46쪽)고 했다.
일제강점기 전북 군산항에서 선적을 기다리는 쌀가마니들. 출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충북지회
일제강점기 전북 군산항에서 선적을 기다리는 쌀가마니들. 출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충북지회


위안부 희생자에 대해선 간단하게 요약하기 어려워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69쪽)이라는 대목을 현재의 한국인이 부인하거나 나무랄 순 없다고 본다. 노동자 아닌 지원병에 대한 언급이긴 하지만 문학평론가 고 김윤식도 박경리의 ‘토지’ 한 대목을 인용해 “‘무지랭이들’에게야말로 신분상승을 위한 절호의 기회에 다름 아니었다”고 쓴 적이 있어 하는 소리다(‘한일 학병세대의 빛과 어둠’).

●어디가 틀렸는지 똑바로 지적하라

조국이 언급한 인용문장 “‘을사오적’을 위해 변명(제17장)하고, 친일청산 주장은 사기극(제18장)이고 독도는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제13장)이라고 힐난한다” 역시 칼럼 필자가 각 장의 제목을 나열한 뒤 ‘힐난한다’고 붙인 것이다. 그러나 책 속을 들여다봤다면 이렇게는 안 쓸 것 같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


“대한제국 멸망의 모든 책임을, 특히 을사조약의 책임을 이완용과 을사오적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을사조약의 체결은 당시 황제였던 고종의 책임이었기 때문입니다.”(204쪽)

“1948년 건국 후 제헌국회가 추진한 건 반민족행위자 처벌이었습니다(214쪽). 왜 그들은(노무현 정부의 집권여당과 민족문제연구소는) 반민족행위자를 친일행위자로 바꿔치기 했을까요? …좌익은 이른바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 공로자들을 친일파로 격하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을 흠결 많은 나라로 만들려 한 것입니다(222쪽).”

“김대중 정부까지 이어진 역대 정부의 냉정한 자세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독도는 국제사회가 영해를 가르는 지표로 인정하는 섬이 아닙니다. 그것을 민족의 혈맥이 솟은 것으로 신성시하는 종족주의 선동은 멈추어야 합니다.”(173쪽)

물론 정해진 칼럼 분량 속에 책 내용을 다 담을 순 없다. 독자가 꼼꼼히 안 읽는 것도 자유다. 인터넷 댓글에선 기사 제목만 보고 냅다 악플을 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학자, 정치인이나 기자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조국 같은 위치에서 읽지도 않은 책을 ‘구역질나는 내용’이라고 규정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연구자는 국익우선주의에 반대한다

책의 대표필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달리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가 없다고 지적한다. 일본을 세세(歲歲)의 원수로 감각하는 종족주의 수준의 적대감정이라며 이런 ‘반일 종족주의(反日 種族主義)’를 그냥 안고선 나라의 선진화는 불가능하다고 책 프롤로그에 썼다.

“오늘날의 한국인이 가지는 통념이 실증적으로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논증하고 싶었다”며 많은 분이 불쾌감을 갖고, 국익에 반하는 일이라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국익을 위해 잘못한 주장을 고집하거나 옹호하는 일은 학문의 세계에선 용납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 “잘못으로 판명될 경우 주저하지 않고 우리의 실수를 인정하고 고칠 것”이라는 자세가 진정한 학자라고 본다(아일랜드에서도 이런 과정을 거쳐 수정주의 역사가 대세로 올라섰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동아일보 DB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동아일보 DB


조국이 페이스북 인민재판으로 연구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이영훈은 법적 대응도 시사했다. 그러나 조국은 곧 법무장관이 될 것이고, 검찰은 물론 사법부도 얼이 빠진 듯하다. 제소를 한들 공정한 판결이 나오겠나.

●군국주의 일본제국처럼 될 것인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감행했을 때 그 나라 많은 지식인들이 전쟁을 찬미했다. 그러나 그건 표면상 그랬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감옥에 들어간다는 공포 때문에 딴소리를 못한 것이라고 최근 번역 출간된 ‘민주와 애국;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공성’에서 오구마 에이지는 지적했다.

조국의 ‘부역· 매국 친일파’ 단죄가 위험한 것도 이런 과거사 때문이다. 1년 전 미국의 포린어페어즈지는 ‘종족적 세계’ 특집에서 “최근 몇 년 새 종족주의(tribalism)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민이, 특히 학자와 정치인, 기자가 공포 때문에 할 말을 못하게 된다면, 문재인 정부는 자신들이 치를 떠는 과거 군국주의 일본제국과 똑 닮은 나라를 만든 꼴이 된다. 만족하는가.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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