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왔다. 1962년생 호랑이띠 여성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2018년 수상자로 선정된 거다. 폴란드에 대해 단 두 번 글을 쓴 것뿐인데 꼭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노벨상을 탄 기분이다.
그의 수상 소감은 특별했다.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어요(13일이 총선이다). 그들은 나라를 바꿔놓을 거예요. 우리 제대로 선택합시다. 민주주의를 위해 투표해 주세요.”
● 손님 기다리며 소설 읽는 나라, 폴란드
폴란드에서 작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공산체제 시절에도 택시 기사들이 손님을 기다리면서 소설을 읽고, 노동자들도 시를 읊는 나라가 폴란드다. 강대국에 세 번이나 나라가 찢겼던 시련 속에서 폴란드어로 쓰인 폴란드문학은 민족의식과 자부심을 일깨워주었다. 민주화 이후엔 좀 달라졌지만 폴란드 작가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 어떤 나라보다 크다고 한국외대 정병권 교수는 논문에 썼다.
유럽 지도를 놓고 보면 폴란드는 딱 중국(中國)이다. 독일어 지역과 슬라브어 지역 사이에 위치해 양쪽으로 문화와 이념과 심지어 군대가 제집처럼 들어오고, 또 나갔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민족과 종교가 다른 우크라이나인, 백러시아인, 유태인, 독일인, 리투아니아인 등이 어울려 살았다. 가톨릭국가이면서도 유럽서 박해받던 유태인들의 피난처가 되어준 너그러운 나라였다.
폴란드 여섯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카르추크는 그 농밀한 역사에 담긴 문화의 다원성과 민속적 다양성에 천착해온 작가다. 집권 법과정의당(PiS) 실세 야로스와프 카친스키가 유럽연합(EU)의 중동·아프리카 난민 수용방침에 격하게 반대하며 “‘무지개색 흑사병’이 우리 가족과 국가의 존립을 위협한다”고 외칠 때, “아니다”라고 말했던 용기도 폴란드의 역사와 문학에서 배웠을 것이다.
● 총선 앞둔 노벨문학상, 나라 분열시켜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도 기나긴 삶과 역사 속에 오류가 없을 수 없다. 토카르추크는 폴란드의 좋은 면뿐 아니라 어두운 면도 제대로 봐야 한다고, 겁도 없이 말해왔다. 2차 대전 중 독일에 점령됐다는 이유로 폴란드가 피해자 코스프레에 안주하며 유태인 학살에 가담한 ‘가해의 역사’를 부인하는 건 지적인 정직성에도, 타인에 대한 도덕적 예의에도 어긋난다고도 말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며 민족의 순수함과 고결성만 강조하고 싶은 정치인에게 이렇게 정직한 작가는 불편하다. 집권세력은 토카르추크를 반역자라고까지 본다. 이번 노벨상이 폴란드를 또 분열시켰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침 총선까지 앞둔지라 여권에선 “서구 좌파들이 민족주의 정권을 물리치려고 폴란드 스파이들을 지원한 것”이라는 험한 말까지 나왔다. 여권이 아닌 쪽에선 폴란드가 정권이 원하는 대로 규정되는 나라가 아님이 입증됐다고 환호하는 건 물론이다.
● 돈만 퍼준다면 독재인들 어떠냐고?
폴란드 실세, 카친스키가 국민을 결집시킨 비법 중 하나가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하면서 이민족 혐오와 증오를 증폭시키는 것이다(요즘 잘 쓰는 단어로 바꾸면 인종적 종족주의라 할 수 있다). 중동과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대거 몰려들자 카친스키는 자국의 안전과 국민 보호를 위해 난민 수용 못하겠다고 EU와 맞짱을 떴다.
당연히 국제사회의 평판은 좋지 않다. 극우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정당으로 분류되는 법과정의당이 야당과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사법부 적폐청산과 물갈이를 밀어붙여 삼권분립과 법치의 민주주의 원칙을 뒤흔든다고 EU는 제재까지 하고 있다(지난번 ‘도발’에 쓴 얘기다).
그럼에도 폴란드 국민은 민주주의보다는 포퓰리즘에 표를 줄 모양이다. 법과정의당은 최저임금 2배 인상, 육아수당 확대 같은 달콤한 공약으로 민심을 공략하는 데다 우리 기업들이 폴란드에 많이 진출한 데서 알 수 있듯, 아직은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어서다. 야당도 지리멸렬한 처지라 13일 총선에선 집권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외신들은 점치고 있다.
●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중요한가
사회적 약자를 좀 더 배려하는 경제정책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만 할 순 없다고 본다. 재정적 여력만 있다면, 성장의 과실을 고루 나누는 데 반대할 사람도 없다. 2011년 ‘아랍의 봄’을 촉발시켜 독재자를 쫓아냈고, 비교적 순조로운 민주화 끝에 13일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를 치르는 튀니지에서 “일자리가 없는데 민주주의가 뭔 소용이냐”는 불만이 터지는 걸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1인당 국민총소득(GNI) 6만 달러가 넘는 홍콩의 반(反)정부 시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3만 달러가 넘는 한국에서 ‘두 세계’의 시위가 벌어지는 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것 역시 사람만이 할 수 있다(우씨, ‘사람이 먼저다’를 연상시킬 의도는 없다…).
다만, 어느 편이 정권을 잡았든 폴란드에는 옳은 건 옳고, 그른 건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가 있어 희망이 있다. 자칭 작가라는 사람이 싸가지 없는 요설(饒舌)로 혹세무민하는 시절이어서 더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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