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관행을 깨는 차원이 아니다. 집권당이 끝내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자리를 차지했다는 건. 바둑에선 상수(上手)가 백을 잡고 흑을 쥔 사람이 먼저 두는 게 관행인데 이걸 깬 것과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은 15일 미래통합당이 없는 상태에서 윤호중 민주당 사무총장을 법사위원장으로 뽑아 올렸다. 법사위원장을 야당에서 맡는 건 2004년 민주당이 여당일 때부터 관행이었다. 법으로 못 박진 않았지만 민주주의가 법으로만 작동되진 않는다. 소수 국민의 뜻도 중요하다는 의미로 배려했던 암묵적 규칙을 박살내고도 그들은 저희들끼리 웃기까지 했다.
야당 법사위원장이 자구(字句) 심사권을 구실로 주요 법안의 발목을 잡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국회는 다르다. 법사위 소관사항 가운데 ‘법률안·국회규칙안의 체계·형식과 자구의 심사에 관한 사항’은 (가)(나)(다)(라)…(아)의 8가지 중 맨 끝인 (아)에 불과하다.
● 야당이 사법부 견제할 길 없어져
여당의 폭거는 법안 통과만을 위해서랄 수 없다. 설령 통합당 법사위원장이 핵심법안을 붙잡고 늘어진대도 176석 거대여당은 패스트트랙(신속 안건 처리)에 올려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
집권세력이 죽어도 법사위원장을 못 내준 이유는 따로 있다. 법사위 소관사항이 법무부, 감사원, 헌법재판소, 법원 사법행정 등이기 때문이다. 소관기관에는 법무부, 헌법재판소, 법원은 물론 대검찰청도 포함된다.
근대 민주정치의 근본원리가 3권 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입법부는 행정부와 사법부를 견제하는 게 본연의 임무다. 문재인 청와대가 행정부 장악은 물론이고 사법부까지 꽉 잡은 지 오래다.
20대 국회 때는 그래도 야당이 사법위원장을 맡아 문제 제기라도 할 수 있었다. 앞으론 불가능하다. 대통령 탄핵소추도 법사위 소관사항이다. 법사위원장은 문재인 정권을 보위하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법조인 출신도 아닌 친문실세 윤호중이 법사위원장을 맡은 것이 이를 입증한다.
● 집권세력 연루 사건, 제대로 수사하고 있나
다수 국민의 희망인 ‘윤석열 검찰’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법사위에 들어간 김종민 민주당 의원은 16일 한명숙 전 총리 수사를 언급하면서 법사위에서 윤석열 총장을 손볼 뜻을 비쳤다. 윤호중 위원장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후속법안부터 서둘러 처리할 게 분명하다. 통합당이 법사위를 보이콧 한대도 무슨 요상한 자구를 넣어서든 집권세력 뜻대로 공수처장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하여 공수처가 출범하면 ‘대통령의 복화술사’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의 공언대로 윤석열 부부는 공수처 수사 1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무리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그럴 리 있겠느냐고? 그 가능성만으로도 윤석열의 칼날이 예전 같을 리 만무하다. 벌써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을 놓고 수사를 제대로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소리가 나오는 판국이다.
법사위가 올 초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출석시켜 “인사에 대한 윤 검찰총장의 의견을 묵살해 검찰청법 34조를 위반했다”고 질타한 것도 야당이 법사위원장이어서 가능했다. 1월 검사장 인사에선 윤석열이 장관에게 맞섰다지만 7월 인사에서도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총선 전부터 ‘식물총장’ 소리가 나오더니 지금은 길고 가늘게 잊혀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 김경수 조국, 무죄판결 받을 수도
법사위는 작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제주 강정마을 구상권에 대해 유례없는 강제조정을 한 판사의 출석을 요구했다. 국가가 청구한 34억여 원을 포기시켰는데 무슨 압력이 있는지 알아야겠다는 거다. 국감장에 판사를 부르는 건 재판의 공정성을 침해할 소지가 있어 결국은 무산됐다.
그러나 내로남불로 유명한 집권당이다. 위원장까지 차지한 터에 유재수 감찰무마 의혹 사건 재판관들을 불러내 압박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드루킹 댓글 사건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던 김경수 경남지사도 종국엔 무죄로 결판날 거라는 추측도 나돈다. 조국 사건 관련자들 역시 어제부터 발 뻗고 잠자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모두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헝가리와 폴란드 등 최근 민주주의가 무너진 나라의 공통점이 바로 그거다. 선거는 실시됐고, 독재자는 의회 승인을 받았으며, 사법부까지 장악했다. “심지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비춰진다”고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은 강조했다.
● 그럼에도…굳이 희망을 찾는다면
통합당이 망연자실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통합당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 보이콧은 하지 말기 바란다. 통합당이 국회 안 나온다고 집권세력이 눈 하나 깜짝할 리 없고, 통합당 의원들이 세비를 안 받아갈 리도 없다.
만약 윤석열에게 강골 검사의 기개가 남아 있다면,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을 목숨 걸고 파헤쳤으면 한다. 위아래에서 압력이 들어온다면,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며 국정원 수사 외압을 폭로했던 2013년처럼 사실을 밝히고 장렬히 산화하는 거다. 있는 듯 없는 듯 검찰총장 2년 임기의 천수를 누리는 것보다 그 편이 장하고 자랑스럽다(그리고 대선에 나서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도 어렵다면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맺음말을 찾는 수밖에 없다. ‘모든 희망이 깨져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춰야 한다. 지금에라도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남아있는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해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