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는 부담 없이 관전할 수 있어 좋았다. 3일(현지 시간) 치러지는 이번 미국 대선은 그게 안 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나라가, 그리고 세계 역사가 달라질 공산이 크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한국 정부가 트럼프 재선을 원하는 반면 한국 국민은 조 바이든 민주당 대통령을 선호한다고 전했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 김정은과 담판해서 단박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대충 ‘봉합’ 정도라고 본다) 북-미 수교를 단행할 대통령은 트럼프라고 믿는 것이고, 보통 국민은 바로 그 점이 불안한 거다.
● 한국의 좌파-강경우파의 기이한 의견 일치
나도 지난주 신문 칼럼에서 그렇게 썼다(美 바이든 당선을 걱정하는 김어준과 집권세력). 그랬더니 당신이 몰라서 그런다, 중국 공산당을 궤멸시키고 더불어 북한 김정은까지 멸망시킬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다, 같은 댓글이 적지 않았다(주로 박근혜 탄핵에 결사반대하는 태극기부대 중에 이런 생각이 많다). 바이든 아들의 부패와 성문제가 폭로됐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에선 좌파와 강경우파가 동시에 트럼프 재선을 지지하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진 셈이다.
미국 고학력 고소득의 ‘리무진 좌파’(우리나라의 강남좌파쯤 된다)는 입만 열면 거짓말에 반(反)지성적, 반(反)엘리트적, 충동적이고 저질스러운 트럼프를 경멸한다. 트럼프가 재선되면 미국은 전체주의로 갈 것이며, 미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트럼프는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같은 신문마다 넘쳐난다.
바닥 민심은 또 다르다. 중국발 코로나19가 터지기 전까지 실업률을 5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줄이면서 저소득층의 소득도 크게 끌어올린 트럼프의 인기가 상당하다. 미국에 사는 지인 중에는 약탈과 폭동을 서슴지 않는 흑인 시위에 질린 나머지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트럼프를 지지하면서도 내놓고 말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바이든이 예고한 증세와 규제에 경제를 걱정하는 이들도 꽤 있다. 바이든이 당선되면 미국은 사회주의로 갈 거라는 불안도 만만치 않다.
● 미군 철수 위협하는 트럼프를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미국 시민이면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를 뽑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반대하는 중국 때문에 불안한 약소국의 궁민(窮民)이다. 시민권을 지닌 미국인과는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로선 우리나라 국익에 도움 되는 미국 대통령이 최고다.
북한 김정은은 지난해 하노이 북-미 회담이 실패로 끝난 다음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전체 조선인민의 최고대표자’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북조선이 아니라 전체 조선인민이다. 중앙통신 영문판으로 보면 더 섬뜩하다. the supreme representative of all the Korean people이다.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한 김정은이 한반도 전체에 진짜 지배력을 행사하려 들 때, 한미동맹을 돈으로 계산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위협하는 트럼프가 과연 한국을 구할지 불안한 것이다. 반면 바이든은 한국인의 마음을 읽은 듯 지난주 한국에 보낸 편지에서 “무모한 협박으로 한국을 갈취하지 않고 동맹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밝혀줬다(북이 침략한 6·25전쟁 때 한국을 위해 참전을 결정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 민주당 소속이었다).
● 독재자들은 트럼프 당선을 원한다
트럼프는 이런 바이든을 약체 후보라고 깔아뭉개면서 “북한의 김정은,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이 나의 당선을 원한다”고 유세한다. 미국의 정보기관들도 중국이 트럼프가 재선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분석한 바 있다. 하지만 중국의 속내는 트럼프의 당선을 바란다는 게 미 외교잡지 포린폴리시의 지적이다. 트럼프가 미국의 몰락을 재촉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유럽도 두 갈래로 나뉘었다. 강한 러시아가 두려운 동유럽의 지도자들은 트럼프 재선을 바라는 반면 서유럽에선 우익 포퓰리즘을 부추긴 트럼프 재선을 반대한다고 뉴욕타임스는 썼다. 이토록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미국 대통령 선출을 미국인들에게만 맡겨야 하다니, 불공평하고 불합리하지 않은가.
그래서 능력이 있는 국가는 미국의 대선에 개입한다. 2016년 대선에서 러시아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해킹 사건을 벌였다고 미 정보당국이 2017년 초 의회에 제출한 조사 보고서에서 밝혔다. 미 상원도 올 4월 이를 공식 인정했다.
● 러시아와 중국이 미 대선에 개입했다는데
단순히 미국 민주당 하원선거위원회를 해킹해 힐러리 클린턴이 낙선하도록 공작한 정도가 아니다. 이젠 많이 알려졌지만 러시아가 인터넷 사용 습관에 따라 그 사람의 정보 수용성을 파악하고, 그가 솔깃하게 들을 만한 정보를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구글 등으로 콕 찍어 전달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선 투표에 참가한 미국인이 1억3700만 명인데 1억2600만 명이 페이스북에서 러시아 콘텐츠를 봤다. 나의 생각이 러시아에 조종당한 것을 나도 몰랐다는 것이 무서운 거다.
러시아의 대선 개입이 발각됐으니 이번엔 못하겠지… 싶지만 그렇지 않다. 크리스토퍼 레이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도 9월 하원 국가안보위원회에서 “러시아가 반(反)러 기득권으로 보는 바이든의 대선 낙선을 위해 사이버 개입을 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중국과 이란까지 뛰어들었다는 지적이다. 뉴스위크 최근호는 ‘미국을 전복하기 위한 시진핑의 비밀 계획’이라는 탐사보도를 커버스토리로 실었다. 로라 대이엘스, 제시 영, 에린 브라운이라는 세 여성이 미국 정치와 사회에 대해 열나게 트윗질을 하고 있는데 어딘가 중국말 티가 난다는 대목은 섬뜩하다. 총선 전 우리나라를 휩쓴 ‘차이나 게이트’가 떠올라서다.
이들 세 여성은 미국인이 아니라 중국이 미 대선을 앞두고 선전선동을 벌이는 봇과 트롤이라고 뉴스위크는 폭로했다. 중국 공산당은 미국의 기업과 대학, 연구소, 사회문화단체와 사교모임 등에 600여 개의 통일전선 조직을 만들어 중국공산당의 이익을 노린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 다음 선거를 기약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그놈의 민주주의 때문에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만 퍼뜨려도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으로선 신나는 일이다. 선거 없는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우월성을 자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턱밑에 있는 한국의 선거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되레 이상한 일 아닌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 역시 ‘그 일이 일어난 방’에서 2018년 의회 선거의 중국 개입을 거론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에 있다는 미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서버를 알아내도록 했다고 폭로했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원조를 미끼로 사실상 미국 대선 개입을 종용했다는 얘기다. 결국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게이트’에서 자신의 개입이 드러나 미 하원에서 탄핵소추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부결되는 바람에 트럼프는 살아남았고, 마침내 재선을 노리게 됐다.
민주주의에서 선거의 의미란 다음 선거를 약속하는 것이다. 손가락을 자르고 싶어도, 참고 기다리면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바꿀 수 있다. 트럼프가 되든, 바이든이 되든 미국에서 다음 대선은 또 치러질 것이다.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나라, 적대국의 개입이 있었는지 자국민의 조작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이 나라에선 다음 선거가 무사히 치러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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