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당국에 촉구합니다. 북한의 핵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11일 신년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끝까지 이 말을 하지 않았다. 북한 김정은이 9일 한국을 겨냥해 “핵무기의 소형경량화, 전술무기화를 보다 발전시키라”며 전술핵무기 개발을 지시한 직후다. 김정은은 “강력한 국방력에 의거해 조국 통일을 앞당기겠다”고 대한민국을 위협했다.
사거리가 짧은 전술핵무기는 한국을 겨냥한다(일본에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북한이 미쳤다고 일본에 전쟁 걸겠나). 전술핵 개발을 김정은이 공개 지시한 것도 처음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남북 비대면 대화를 제안한 문 대통령은 한반도 아닌 천상(天上)의 대통령 같았다. 국민 세금이 들어간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해도, 우리 공무원을 쏴죽이고 불태워 죽여도 ‘전쟁 불용’ ‘상호 간 안전보장’ ‘공동번영’이 3대 원칙이라고 했다. 북핵 불용이 아니고 전쟁 불용? 그럼 핵은 용인할 수 있단 말인가?
● ‘북의 비핵화 의지’ 文은 답변 피했다
궁금하지만 대통령한테 물을 수도 없다. 기자회견을 이어서 하면 신년사가 주목받지 못한다며 질문도 안 받아서다. 그러나 지난해 신년회견 때도 대통령은 답하지 않았다. 첫 질문이 “김정은의 비핵화, 그리고 김정은의 답방을 여전히 신뢰하느냐”는 것인데 대통령은 묻지도 않은 북-미 간 신뢰에 대해 한참 말했을 뿐, 김정은의 비핵화(의지)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양 정상 간의 신뢰는 계속되고 있고… 저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고 싶다… 남북관계도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대화를 통해서 협력을 늘려나가려는 그런 노력들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제대로 된 기자회견이라면 “그래서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보느냐”고 재차 물었어야 했다(이번 기자회견에선 제발 보충질문을 하기 바란다). 대통령이 일부러 핵심을 피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일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없고, 비핵화하지도 않을 것을 대통령도 알기에 답변을 피했다면 국민을 속인 것과 다름없다.
● ‘북핵 불용’에서 ‘전쟁 불용’으로 바뀐 원칙
문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7년 10·4남북공동선언 10주년 기념식에서 “북한의 핵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도 “북한이 무모한 선택을 중단한다면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은 항상 열려 있다”고 대화를 강조한 거다. 한 달 뒤 국회 시정연설에서 밝힌 한반도 안보 5대 원칙에도 ‘북핵 불용’은 당연히 포함돼 있었다.
‘북핵 불용’이라는 단어는 2018년 4월 1차 남북정상회담 합의에서 사라진다. 문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과 합의한 것은 △남북관계 전면적 개선 △군사적 긴장 완화와 전쟁 위협 해소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와 전쟁 불용이었다. 북에서 말하는 비핵화는 북핵 폐기가 아님을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주한미군 철수는 물론 한반도 핵우산 보장 철회, 일본과 괌에 있는 미국 핵무기 철수까지 포함된다.
실은 이보다 넉 달 전, 문 대통령 중국 방문 때 이미 ‘북핵 불용’은 실종됐다. 두 정상이 의견을 같이했다는 한반도의 평화·안정을 위한 4가지 원칙이 △전쟁 불용 △비핵화 견지 △북핵의 평화적 해결 △남북관계 개선이다. 만일 문 대통령이 중국에서 어떤 압력(또는 영감)을 받아 ‘북핵 불용’ 입장을 ‘전쟁 불용’으로 바꿨고, 남북회담에서도 그렇게 합의한 것이라면 충격적이다.
● 국민과 세계를 속여 선거 이기니 좋은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중요한 것은, 북-미 사이에서 한국이 그걸 보장했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와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국민 앞에 밝혔다. 이때 ‘김정은’이 아니라 ‘북측’이라고 밝혔다는 데 유의하기 바란다.
정의용은 이 결과를 들고 트럼프를 만난 뒤 “저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언급하였다’고 했다”고 브리핑했다. 김정은이 자기 입으로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고 정의용은 세계에 천명을 한 것이다. 정의용이 속였는지, 그의 상관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인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그 다음은 거짓 약속에 속은 더러운 사랑의 역사다. 햇볕정책의 상대는 철갑을 두르다가 전술핵무기까지 개발하는데 이쪽은 스스로 옷을 벗다 못해 무장해제로 가는 추세다. 2018년 문 정권은 국민과 미국과 북한을 각각 듣기 좋은 소리로 속인 결과 지방선거에서 벼락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4월 재·보궐 선거와 내년 대선 때 비슷한 북한 쇼는 안 통할 것이다. 만일 문 대통령이 “북핵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대북정책을 완전히 바꾼다면 또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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