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마법’에 야권이 또 빠져들었다. 국민의당(이하 국당) 안철수 대표의 작년 말 서울시장 출마 발표는 거의 도시락폭탄 수준이었다. 의석수 3석의 군소야당 대표가 담대하게 야권후보 단일화를 제안하는 정도가 아니다. “서울의 시민후보, 야권 단일후보로 당당히 나서 정권의 폭주를 멈추는 견인차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쉽게 말해 중도층 지지를 받아 당선되려면 자기가 야권단일후보로 나서야 하니 다른 야당은 후보를 내지 말든가, 양보하라는 소리다.
명색이 제1야당이 안철수 앞에 당장 엎드릴 리 없다. 안철수도 출마 선언 당시 국민의힘(이하 국힘) 입당 가능성에 대해 ‘열린 마음’이라고 했고, 통합경선도 “공정경쟁만 된다면 어떤 방식도 좋다”고 밝혔다. 이후 야권은 안철수가 던진 도시락폭탄에 혼란과 갈등, 분열로 치닫는 양상이다.
● 총선 지역구 포기가 양보였다고?
국힘에서 입당하라, 들어와서 경선하라, 노래를 부른 건 당연하다(안철수가 열린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하여 국힘과 국당이 통합경선 방식에 합의해낸다면,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서울시민은 희망차게 새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국힘이 서울시장 후보를 준다고 약속을 한대도(공당으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철수가 그 당에 입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합당도 시원치 않을 판에 입당은 웃기는 소리다). 선입당 후경선이 싫은 건 이해한다지만 안철수는 14일 “이미 지난해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고 양보했는데 또 양보를 하라고 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오잉? 국당이 지역구 후보를 못 낸 게 아니라 양보를 한 거라고?
긴 외유에서 귀국해 2020년 1월 국당을 창당한 안철수는 국힘(당시 미래통합당)과의 연대를 단호히 거부했었다. “여당과의 일대일 구도는 백전백패”라고 했다가 나중엔 “거기(통합당) 대표나 공천관리위원장이 오히려 생각이 없다고 한다”고까지 했다. 당 지지율이 지지부진해 안철수계 의원들이 자꾸 통합당으로 떠나자 2월 말 기자회견을 열어 “253개 지역 선거구에 후보자를 내지 않기로 했다”고 비례대표 후보만 공천한 게 전부다. 그게 아니라 안철수 자신이 서울시장(원래는 대통령) 야권 단일후보가 되려고 일부러, 미리, 당을 희생시키는 양보를 했다면 그야말로 당을 사유화한 당권남용이다.
● 서울시장 포기는 부친 반대 때문이었다
‘양보’라는 데 안철수의 상품가치가 있기는 하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지지율 50%를 달리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안철수는 시민운동가 박원순을 위해 조건 없는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써 단박에 대선주자로 등극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안철수의 ‘300명 멘토’ 중 하나였던 윤여준은 그해 12월 “안철수가 부친의 결사반대 때문에 (출마) 못 한다고 했다”고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나도 생생히 기억한다. 서울시장에 출마를 생각 중이라는 기사가 9월 1일 밤 오마이뉴스에 뜨자 다음 날 모든 매체가 안철수의 입만 바라보는 형국이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출마를 검토하고 있다며 9일 최종 결심을 밝히겠다고 했다. 그런데 윤여준에 따르면 안철수는 2일 아침에 벌써 “부친이 결사반대한다”고 전화해왔다는 거다. 이렇게 발칵 엎어놓고 안 하겠다면 장난하는 거냐, 빠지더라도 명분이 있어야 하니 박원순에게 양보한다며 빠져야 명분이 선다는 취지로 말해줬더니, 그게 7일 사심 없이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포장됐다는 얘기다.
● 파파보이 안철수, 지금은 달라졌을까
안철수의 부친 안영모 씨도 이 사실을 인정한다. 2012년 4월 국제신문 인터뷰에서 “평소 내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한 요소도 있었을 것”이라며 또 한 가지 중요한 얘기를 했다. 안철수가 2012년 대선에 나오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을 때였다. 부친은 “내가 성격을 봐서 아는데 큰아이는 경선하자고 해도 경선할 아이가 아냐. 절대 경선은 안 한다”고 단언한 것이다.
실제로 그해 민주당 대선후보 문재인과 단일화 과정에서 안철수는 경선을 하지 않았다. 당시 안철수의 진심캠프에서 단일화 협상에 나섰던 금태섭은 무슨 대책이 있는 게 아니라 문재인의 양보만 기다렸다고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에 썼다. 계속 시간만 흘러가 나중엔 여론조사 방식만 남았는데 그마저 못 믿겠다며 거부해버렸다. 그러더니 안철수는 누구와 의논했는지도 모르게 11월 23일 느닷없이 사퇴를 선언했다.
‘안 후보의 지지율이 문 후보 지지율을 압도하고 있다고 해도 제1야당의 후보가 자진해서 사퇴하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금태섭이 책에 쓴 대목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국힘은 10명의 경선 주자 중 후보를 만들어낼 것이다. 서울시를 집권당의 폭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선 야권후보 단일화가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러나 안철수로선 더는 물러설 수 없다. 그렇다고 국힘과 단일화 경선을 할 ‘아이’인지는 의문이다. 과연 안철수는 달라졌을까.
● 눈썹 굵어진 안철수, 마음도 굵어졌어야
아닌 것 같다. 눈썹이 진해지고, 목소리도 굵어졌지만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에 “저를 잘 알지 못하는 분들까지 나서 근거 없는 비판을 한다”고 발끈한 걸 보면 안철수는 아직 밴댕이속이다. 10년의 정치 실패를 반성하고, 공부하며, 큰 뜻을 갈고 닦았다면 “과거에 그랬다면 미안하다. 지금의 나는 다르다. 같이 정치하며 큰 뜻을 펴보자”는 식으로 정치인의 도량을 보여줬어야 했다.
국힘과 단일화하기로 결론이 났다 해도 경선방식에 합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안철수는 “단일후보 결정은 이 정권에 분노하는 서울시민들이 하면 된다”고 했는데 국힘이 제시하는 여론조사 방식은 ‘이 정권에 분노하는 서울시민 대상’이 아니라는 식으로 합의가 안 될 가능성이 크다(심지어 국당의 이태규는 14일 “100% 시민경선에서 표본수 표본도 전체 표본으로 할지, 야당 지지층과 무당층으로만 할지, 적합도로 할지, 경쟁력으로 할지, 여기에 따라서 엄청난 관점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복잡한 소리를 했다).
경선방식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안철수는 당연히 출마한다. 안철수와 국힘, 무소속의 금태섭까지 야권이 표를 갉아먹다 패배할 공산이 크다.
● 그래도 집권당에 비하면 양질이다
집권당 소속 고 박원순 서울시장 때문에 하게 된 보궐선거다. 자기네 잘못 때문에 재·보궐선거를 하게 되면 후보를 안 낸다는 당헌까지 고치는 집권세력에 비하면, 안철수나 국힘은 양질이라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제1야당인 국힘이 이 선거도 이기지 못하면, 그런 당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서울시민이 원하는 것은 야권의 승리이지 국힘의 운명엔 미안하지만 관심 없다. 어떤 식으로든 국힘은 안철수를 껴안고 승리하든지, 논개처럼 자폭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안철수든, 국힘이든 비판전으로 제 살 깎아먹진 말았으면 한다(좌파는 그런 짓 절대 안 한다. 그러고 보니 안철수는 좌파는 아닌 모양이다). 행운을 빈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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