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총선 전에 국민의힘(당시 자유한국당)은 “우리가 지면 (한국이) 베네수엘라 된다”고 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국힘이 이겼대도 베네수엘라처럼 될 공산이 없지 않다.
김명수 대법원장 사태의 본질은 사법부(司法府)가 3권 분립의 민주주의 원칙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온 국민 앞에 드러냈다는 데 있다. 대법원이 행정부, 입법부에 장악돼 있으면 아무리 야권이 총선에서 승리해도 판판이 무력화 된다는 사실을 베네수엘라가 보여준다.
● 집권세력만 봐주는 차별적 법 적용
2015년 말 베네수엘라 야권연합인 민주연합회의(MUD)가 17년 만에 총선에서 승리했다. 167석 중 112석. 대통령 탄핵 개시, 공직자 퇴출 등 막강한 권한을 갖는 3분의 2 의석을 아슬아슬하게 넘긴 수치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놀고 있지 않았다. 새 의회 출범 직전 집권 통합사회주의당(PSUV)을 움직여 대법원 법관 32명 중 13명을 더 친마(친마두로) 인사로 갈아버린 거다(이 나라에선 대법관을 의회가 선출. 헌법재판부도 대법원 안에 있다).
선출된 권력이 민주주의 제도를 허물어 독재를 굳히는 첫 공식이 ‘심판 매수’다. 법원과 검찰, 정보기관, 국세청, 선거관리위원회 등을 ‘내 편’과 충신으로 채우는 것이다. 임기가 정해져있어 해임하기 어려우면 마두로처럼 ‘대법원 재구성’을 한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전임 대통령 우고 차베스가 2004년 대법원 정원을 늘릴 이래 대법원은 대통령에 반(反)하는 판결을 한 적이 없다.
우리가 익히 보고 있듯, 심판 매수는 정권 보호막 이상의 역할을 한다. 그놈의 내로남불! 법률을 차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지네 편을 감싸고 적들에 복수하며, 공정과 정의를 박살냄으로써 국민에게 분노와 절망과 냉소를 안긴다는 점에선 거의 살상무기다.
● 검찰총장이 감히 정권비리 파헤치다니
마두로의 대법원은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의결한 야권 정치인 사면법 등에 판판이 위헌 결정을 내렸다. 국회가 대통령의 경제비상사태 명령을 부결한 것도 무효로 판결했다. 관보 게재 절차를 안 지켰다는 것이다(절차적 문제로 당선무효형 원심을 파기한 김명수 대법원이 연상된다). 심지어 2017년 3월엔 의회 입법권을 박탈해 대법원이 가져버렸다.
물론 대법원도 이유는 있다. 야당 의원 3명이 부정 당선됐다는 대법원 결정을 국회가 무시했고, 국회가 법치주의를 모욕했으므로 입법권이 박탈됐다는 게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관 측 설명이다. 그러나 주베네수엘라 한국 대사관은 “마두로 정부가 사실상 군과 대법원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 홈페이지에 소개해 놨다.
마침내 마두로는 ‘의회 재구성’에 나선다. 제헌의회를 545명 전원 친마 의원으로 구성한 거다. 제헌의회가 제일 처음 한 일은 마두로 정권비리를 수사하던 검찰총장의 해임이었다(이 역시 우리의 윤석열 총장을 연상케 한다). 제헌의회 결정에 따라 마두로는 조기 대선을 실시해 2018년 재선됐고, 2019년 1월 젊은 야당 국회의장 후안 과이도가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을 인정 못한다”며 과도정부의 임시 대통령을 선언한다.
● 쿠데타에도 대법원장이 필요했다
마두로의 최측근인 대법원장 마이켈 모레노는 그 뒤에도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다. 2019년 4월 말 쿠데타 실패 또한 대법원장의 배신 때문이라는 게 워싱턴포스트 보도다. 백악관 안보보좌관 시절 존 볼튼 역시 대법원이 제헌의회를 불법으로 선언하고, 마두로가 사임하고, 군이 과이도를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했다고 ‘그 일이 일어난 방’에 썼다.
대법원장은 법보다 권력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쿠데타 주동세력과 막판 비밀회의 때 “성공하면 과이도가 대통령 되는 건가?” “내가 잠시 하면 안 되나” 이러더니 결정적 순간에 연락이 끊어졌다는 거다.
지금 그 나라 대법원장은 한때 동지였던 자들을 반역죄로 심판 중이다. 국회가 구성해야 할 새 선거위원회를 구성하고, 두 주요야당의 지도부 기능을 중단시킨 뒤 새 지도부를 임명하기도 했다. 그 결과 작년 말 총선에서 마두로의 정당은 민심과 상관없이 91% 득표율을 올렸다. 다같이 박수 짝짝짝.
● 대한민국 판사들은 안녕하신가
위기의 미국 민주주의는 조 바이든 민주당 소속 대통령과 함께 일어섰다. 하지만 대선 후에도 위태롭던 법치주의를 복원해낸 최종병기는 결국 대법원이었다. 미 연방대법원은 대선 이후 근 한달 계속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무효 소송전에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바로 세운 것이다. 확실한 보수 에이미 코니 배럿 신임 대법관도 두 달 전 자신을 지명해 준 트럼프에 대한 보은 따윈 생각도 안 한 모양이다.
‘21세기의 사회주의’를 표방한 베네수엘라에선 사법권이 독재자의 통치수단일 뿐이다.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자랑하는 중국에서도 중국공산당은 법 위에 존재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노동당 규약이 헌법의 상위개념이다. 그러나 문주주의(文主主義) 대한민국(大韓文國)의 대법원장은 문파를 머리 위에 모신 형국이다.
대법원장이 정권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야권이 서울·부산 보궐선거에서 승리해도 안심할 수 없다. 2022년 대선까지 시간이면 대법원은 선거 구도까지 뒤바꿀 수 있다. 설령 야권이 정권 교체에 성공해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엔 문 정권이 꽂아놓은 재판관들이 수두룩하다.
전 법무장관 추미애가 윤석열 검찰총장을 징계했을 때는 추라인을 제외한 전 검사들이 법치주의를 지킨다며 분연히 나서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지켜온 우리나라인데 한줌 그악스러운 무리에 민주주의를 강탈당할 순 없다. 대한민국 판사들의 자존감은 지금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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