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당이 또 국민의 간을 보는 모양이다.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박준영 해양수산부,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부적격자라는 사실이 인사 청문회에서 확인됐다. 재·보선 참패 뒤 민의를 겸허히 받들겠다고 고개 숙인 게 불과 한 달 전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상식적 정당이라면 “이런 인사 더는 안 된다”고 청와대와 맞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보다시피 민주당은 상식적이지 않다. 청와대가 직접 정한 인사원칙을 어긴 적이 한두 번도 아니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또 ‘깜’도 안 되는 장관들을 내놨군, 그럼 그렇지 청와대가 어디 변하겠어… 국민이 이렇게 체념하고 넘어가면 민주당도 그냥 넘어간다(이게 바로 집권세력이 노리는 바다).
여론이 심상치 않으면? 민주당은 송영길 대표가 공언한 것처럼 ‘당 주도’ 당청관계로 획기적 변신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당이 국민의 간을 보고 있다는 얘기다.
● 태영호 망명할 때 도자기 사 모은 외교관부인
문재인 정권 4년 실패 이유 중 하나가 인사임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대깨문 빼고). 퇴임 1년 전 선거에서 완패했으면 청와대는 마지막 인사라도 제대로 해서 국민의 용서를 구해야 옳았다. 재·보선 패배 열흘도 안 돼 발표한 장관 인사를 보면, 청와대는 개전(改悛·행실이나 태도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바르게 고쳐먹음)의 여지가 손톱만큼도 없다. 아니면 문 정권 임기 내 챙겨줘야 할 빚이 너무 많거나.
박준영 부인의 도자기 사진이 신문에 나온 날, 나는 신안 앞바다 보물선이 또 나온 줄 알았다. 예쁜 그릇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단박에 아는 로얄 알버트, 로얄 덜튼 같은 명품 브랜드 접시, 커피잔, 장식종 등이 무려 1250점이란다. 박준영이 2015~18년 주영국대사관 참사관으로 있을 때 사 모았다는 거다.
영국에 잠깐 여행이라도 해본 사람은 안다. 커피 잔 몇 개 사오고 싶어도 비행기 갈아타면서 안 깨뜨리고 갖고 올 재간이 없어 많이 못 산다는 걸. 그런 꿈의 그릇들을 박준영 부인은 ‘외교관 이삿짐’으로 곱게, 관세 한 푼 안 내고 들여왔다. 그래서 묻고 싶다.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이 2016년 북한의 주영국대사관 공사 시절 목숨을 걸고 망명할 때, 이 나라 외교관들은 그따위로 특권을 누리며 살았는지.
소형어선으로 중국산 담배 밀수도 단속하는 해경청이 해수부 장관 소속으로 돼 있다. 다른 부처면 몰라도 박준영이 절대로 해수부 장관을 맡아선 안 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 청와대 판단력이 의심스럽다
‘여자 조국’ 타이틀을 거머쥔 임혜숙에 대해선 인사 검증 자체를 안 한 게 분명하다. 나중을 위해 기록해두자면 부동산투기, 다운계약, 13차례 위장전입, 증여세 탈루, 민주당 당적 보유, 연구윤리 위반, 제자의 논문 표절, 자녀 연금보험료 대납, 자녀 복수국적, 종합소득세 체납, 탈세,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업무 공백, 외유성 출장 등 의혹만 13가지다.
특히 해외출장 때 가족 동반을 ‘관행’이라고 변명한 대목은 가증스럽다. 해외에서 양해한다고 해도 그건 대개 초청자 측 부담일 때다. 국가예산으로 딸과 남편까지 동반해 호텔 방값을 아낀 깍쟁이한테 집권당은 퀴리 부인이라고 헌사를 바쳤다니, 마리 퀴리에 대한 모독이다.
노형욱이 2011년 공무원 특별분양제를 이용해 세종시 아파트를 분양받고는 관사에 살다 2017년 판 것도 용서하기 어렵다. 이런 인물이 “부동산 부패 청산이라는 국민적, 시대적 요구를 충실히 구현”(청와대 발표)할 리 없다. 그때는 투기가 아니라 해도 이 정권의 ‘투기 기준’이 변했기 때문에 국토부 장관 자격이 없는 것이다. 차액을 기부하고 말고가 아니라 이런 인사를 밀어붙인 청와대 판단력이 의심스럽다.
● 뭘 믿고 이런 인사를 밀어붙였나
깨끗한 줄 알았던 김부겸 총리 후보자도 실망이다. 라임자산운용의 사모펀드 테티스11호 가입자 6명 중 김부겸 차녀와 사위, 여섯 살 세 살짜리 손자 손녀 등 4명이 들어 있는 건 김부겸네를 위한 펀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총리에 지명된 것은 라임 수사를 막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아닌가 싶다.
평판 조회가 아니라 인터넷 클릭 몇 번만 해봐도 알 만한 사실을 청와대 인사 검증팀은 완전 외면했다. 몰랐다면 무능이요, 알고도 그냥 밀어붙였다면 무책임하다는 말을 반복하기도 지쳤다. 그러나 국민이 이렇게 지쳐서 관두길 문 정권은 바란다는 게 이 글의 핵심이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인사라인만 무능하고 무책임한 게 아니다. 한 달 전 이철희 정무수석이 내정될 때만 해도 여권에서 “국민들도 청와대 인사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만큼 상징적 측면에서라도 김외숙 인사수석 교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는데 무슨 이유인지 쑥 들어갔다. 김외숙의 권력이 막강하거나 김외숙이 뭐라고 해도 안 통할 만큼 막강한 측에서 이번 인사를 밀었기 때문일 터다. 그래서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이 따위 인사를 밀어붙였는지.
● 개구리도 물이 끓으면 튀어 나온다
역치(閾値)라는 게 있다. 생물체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의 자극의 세기를 말하는데, 같은 역치가 주어지면 생물체는 점점 무감각해지는 게 사실이다. 독일 나치 때도 그랬다. 갑자기 유대인들을 잡아 죽여 점잖은 독일인들을 경악시킨 게 아니다.
처음엔 비(非)유대인 상점에 ‘독일인 사업체’라는 표지를 붙이게 한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다음엔 ‘유대인’이라는 명찰을 붙이게 한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다음엔… 이런 식으로 차츰 강도를 높이면 나중엔 유대인 가스 학살이 있어도 놀라지도, 흥분하지도 않더라고 했다. 2022년 대선 때까지 어떤 충격적 일을 자행하려고 이따위 인사를 밀어붙이는지 정말 궁금하다.
(단, 개구리를 물솥에 넣고 서서히 끓이면 개구리는 튀어나오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예는 들지 말자. 미국 MIT 박사 등이 1995년 실제로 해보니 찬물을 넣고 끓일 때는 4분 20초 만에, 미지근한 물을 넣고 끓일 때는 1분 57초 만에 개구리가 튀어나왔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국회가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았는데도 문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한 장관급이 무려 29명이다. 이번에도 그럴 공산이 크다. 검찰총장 후보자 김오수 역시 ‘문지기’로 앉히고 말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들불 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문 대통령이 인사를 강행했음을 기록에 남겨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그들은 진짜 국민을 가마니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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