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상상을 해봤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해 평화적 통일을 했다. 그리고 16년 뒤. 북한 출신 여성이 통일한국, 그것도 보수정당의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을까.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전체주의 공산당 일당 독재국가 동독 출신의 그가 2005년 중도보수 정당인 기독민주연합(CDU) 대표로서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것이다. 그리고 16년 간 3연임이라는 ‘장기집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세계인의 찬사를 받으며 새 내각이 구성되는대로 물러날 채비를 하고 있다.
정권교체 돼도 평화롭게 잠 잘 수 있어야 선진국
안다. 독일은 의원내각제이고 우리처럼 대통령제가 아니라는 걸. 대통령제라서 국민이 직접 선출해야 했다면 동독 출신 대통령은 어려웠을 수 있다.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본 이유는 마냥 부럽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야당인 사회민주당에 정권을 넘기고도 잠을 잘 자고 있느냐는 쥐트도이체차이퉁과의 인터뷰에 “우리가 정치적으로 차이는 있겠지만 평화롭게 잘 잘 수 있다”고 평화로운 답변을 했다.
내각제 개헌 같은 뜬금없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 중인 헝가리는 내각제 아래서도 삼권분립을 뒤흔들어 국민의 기본권을 위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나라다. 문 정권의 헌법재판소와 사법부와 검찰을 장악해 법치 훼손하기, 언론 독립성 뒤흔들기나 민족감정 악용 같은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행태는 헝가리를 그대로 본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독재국가 출신이 독재자 되는 아이러니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1998년부터 4년간, 그리고 2010년부터 2018년 4월 총선까지 내리 압승한 유럽 포퓰리스트의 대표선수다. 공산 헝가리 시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우리로 치면 86그룹이 오늘날 독재자가 됐다는 사실은…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게 경로의존성의 법칙이라고 주장하고 싶진 않다(집권하면 뇌가 달라진다는 연구도 있다고는 한다). 왜 하필 반(反)민주화-포퓰리즘 경향이 동유럽과 구소련, 아시아지역으로 번졌는지 통탄스러울 뿐이다. 메르켈에게 존경스러운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35년을 살았으면서도 독재에 중독 되기는커녕, 자유민주주의 대표선수로 비자유주의와 포퓰리즘에 맞섰다는 사실!
그것을 메르켈 자신은 이렇게 표현했다. “인생의 35년을 자유가 없는 체제에서 살았던 누군가가, 그래서 자유의 특별한 가치를 잘 이해하는 누군가가…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욕구를 가진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통일독일의 장관으로 발탁한, 정치적 아버지인 헬무트 콜 기민당 대표가 1999년 불법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렸을 때도 “콜은 해당(害黨)행위를 했다”고 비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직 메르켈만이!
메르켈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았다
1999년 12월 2일 아침, 앙겔라 메르켈의 이름으로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테차이퉁지에 실린 기사는 독일 정계에 폭탄을 안겼다. “당은 걸음마를 배울 필요가 있고 노병(old warhorse) 없이 정적들과 과감히 맞서 싸워야 한다.”
독일 통일을 이끌어냈고, 16년이나 총리를 지냈던 기민당 거물에게 동독 출신의 ‘길거리 꼬맹이’가 폭탄을 던지리라 상상했던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콜은 불법정치자금 수사를 은근히 방해하는 중이었다.
메르켈은 그런 무시무시한 인물을 상대하는 게 겁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기이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 당의 미래를 생각할 뿐(하하. 우리나라의 어떤 사람이 연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듬해 메르켈은 기민당 대표직에 출마했고 반대 없이 당선됐다. 45세 물리학자 출신의 새 대표 기민당의 새 출발이었다.
거짓선동으로 집권한 자, 히틀러뿐이랴
흔히 메르켈 리더십으로 경청과 합의를 들기도 한다. 하지만 독일 정치는 연정(聯政)이 기본이고, 연정은 경청과 합의의 과정이다. 연정은 나치와 세계대전, 영토분할 등을 겪으며 교만과 분열, 극단주의를 철저히 반성한 결과라는 연구결과가 적지 않다. 경청과 합의가 메르켈만의 리더십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얘기다(경청과 합의는 물론 중요하다. 우리나라 같은 현실에선 더더구나 당연히).
그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메르켈은 집권 뒤에도 끊임없이 지키고 확대하는 신념과 정치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메르켈 리더십’을 쓴 케이티 마틴은 메르켈만큼 오르반 빅토르 총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등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맹렬하게 지켜온 지도자는 없다고 했다.
전체주의 경찰국가에서 살아온 메르켈은 거짓선동의 위력을 잘 안다. 과거 독일에서 히틀러가 선거로 집권한 것도 “빨갱이와 유대인들이 독일의 등을 찔렀다”는 거짓선동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거짓선동으로 집권한 지도자가 어디 히틀러뿐이랴.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변할 수 있다
메르켈처럼 동독에서 살아본 경험도 없으면서 정말 심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대선 주자를 보면 안타깝다. 메르켈은 지난 16년간 독일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했다. 히틀러의 현란한 연설과 괴벨스의 대중선동에 속았던 독일 국민들이었다. 이 나라가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은 것도 사이다와 거리가 먼 메르켈의 단조로운 연설 덕이 컸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생물과 같다.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복(公僕)과 전문가집단과 시민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또박또박 제 몫을 다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무너지기 십상이다.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우리나라에도 메르켈 같은 정치인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메르켈의 2019년 미국 하버드대 연설을 보며 위안을 삼았으면(또는 경각심을 가졌으면) 한다.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변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일 일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개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보장된 게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평화, 번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충동이 아니라 가치 옆에 굳건히 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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