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권의 성패는 종종 아주 초기에 결정된다.” 서울대 장덕진 교수는 지난주 경향신문 칼럼에 이렇게 썼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용산 집무실 이전 계획을 발표하기 전이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공약 1호인 적폐청산에 5년 내내 매달리는 바람에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청와대 해체 및 대통령실 광화문 이전’이라는 윤석열 대통령 후보의 공약은 10대 공약 중 1호도 아닌 열 번째다(1호 공약은 코로나 위기 극복). 만약 윤석열 정부가 실패한다면(재수 없는 소리 미안), 출범도 하기 전에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둘러싼 소란 때문일 공산이 크다.
그래서 납득이 안 되는 거다. 대체 왜 윤 당선인은 이 중차대한 시기에 대선 공약집 340쪽 중 329쪽에 실린 공약에 매달려 귀중한 ‘정치적 자산’을 까먹고 있는 건가.
● “광화문 된다”더니 용산 간다고?
압도적 승리를 했으면 또 모른다. 겨우 0.73%포인트 차이로 이겨 문 대통령한테 “역대 가장 적은 표 차로 당락이 결정됐다”는 ‘조롱’까지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탈권위적 이미지가 절실했을 수 있다. 출근길에 국민과 반갑게 인사하고, 그 동력으로 국민 앞에 자랑스러운 대통령으로 펄펄 날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기대했던 ‘청와대 이전’도 광화문까지였다. 그래서 대선 기간 중인 1월 27일 그는 “경호 문제나 외빈 접견 문제는 충분히 검토했다”며 “인수위 때 준비해 임기 첫날부터 광화문 집무실 근무가 가능하다”고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당선 다음 날인 10일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과 이철희 정무수석이 찾아와 ‘문재인 정부도 (이전을) 검토하다 실패했다’고 하자 윤 당선인은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느냐”며 광화문 시대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17일자 동아일보가 단독보도 했듯, 광화문 이전은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호와 보안 문제 등으로 시민들에게는 거의 재앙 수준이라는 거다. 대신 용산구 국방부 신청사로 이전하겠다고 윤 당선인은 20일 사과도 없이, 지휘봉을 들고 당당히 발표했다. 그 뒤엔 ‘윤석열체’로 쓰인 백드롭이 걸려 있었다.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 안보 놓고 실험하는 자 누군가
광화문이 불가능해 용산을 선택한 건 좋다고 치자. 윤 당선인은 중국집에 짜장면 떨어졌다고 짬뽕 시켜 먹고 와서는 “참 잘했어요” 칭찬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광화문과 용산은 짬짜면과 차원이 다른 문제다. 문 대통령이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가장 큰 문제는 안보(安保)이고, 절차와 소통 문제가 다음 문제다.
우선, 5월 9일 밤 12시까지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자는 문 대통령이다. 비록 문 대통령이 안보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기는 해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시기에 안보 공백을 초래할 수 있는 청와대 집무실 이전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 대통령도 과거 대선 때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공약한 바 있어서 청와대를 국민께 돌려드린다는 뜻에 공감하고 있다. 시간에 쫓겨야 할 급박한 사정이 있지 않다면 국방부, 합참, 청와대 모두 보다 준비된 가운데 이전을 추진하는 것이 순리”라는 문 대통령의 입장은 옳다는 얘기다.
이런 청와대에 대고 윤 당선인의 경호경비팀장 김용현이 “역겹다”고 비판한 건 무례하기 짝이 없다. 주군에게 충성하겠다고 현직 대통령에게 함부로 하는 경호팀장이 국민을 받들 리 없다. 더구나 국방부 신청사가 안보에 취약하다는 민주당 설명(또는 선동)은 들을수록 불안하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 같은 일이 터져도 새 정부는 할 말 없을 판이다. 국민 앞에 제대로 설명하는 절차 한번 거치지 않은 채 너무나 서두른 탓이다.
● 그것은 상식에 어긋난 제왕적 대통령질
용산 이전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세계 주요 국가의 대통령이나 내각제 총리의 집무실은 전부 도심에 있다”며 “국민과 호흡하는 도심에 있어야 민성을 들을 수 있고, 직언과 고언을 해야 할 참모들도 편안한 가운데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용산은 고려 때 몽고 침략군부터 일제 침략군까지 주둔했던 곳이다. 주한미군이 떠난 용산공원에 문 정권은 생태공원을 만들려 했고,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임대주택 등을 짓자고 했었다. 나는 용산공원 한쪽에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서는 것이 ‘제2의 해방’과 맞먹는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5월 10일 20대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서두는 것은 안보 문제를 포함해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특히 ‘공정과 상식’을 들고나왔던 윤 당선인이 “지금은 여론에 따르는 것보다 정부를 담당할 사람(즉 윤석열)의 철학과 결단이 중요하다” “일단 청와대 경내로 들어가면 벗어나는 게 더 어려워진다”며 “제왕적 대통령을 내려놓는 방식을 제왕적으로 한다는” 점은 정말이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비판을 다 알면서도 집무실 이전을 밀어붙이는 고집(불통)의 일하는 방식이 국민을 더 불안하게 한다.
● 물러서면,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
그리하여 제왕적 새 대통령이 5월 10일 취임했다고 치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무총리 인준부터 순순히 협력해 줄 것 같은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쿼드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방문을 계기로 5월 하순경 한국을 찾으면, 윤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 말고 어디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할 터인가. 6월 1일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은 과연 승리하겠으며, 앞으로 5년간 대통령실은, 정국은 얼마나 소란할 것인가. 협치나 통합은커녕 성공한 대통령, 아니 우파 정권 재창출은 가능할 것인가.
나는 지금 윤 당선인이 물러서면,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고 본다. 5월 9일까지는 문 대통령에게 청와대를 맡기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다. 집무실 이전은 그 다음, 윤 대통령 책임 아래 하는 것이 옳다. 일단 문 대통령처럼 청와대 여민관에서 집무하다가 국민적 합의를 거쳐 8·15 광복절에 용산 국방부 신청사로 옮기면 또 어떤가. 안보 공백도 없고, 국민도 불안하지 않고, 윤 대통령도 제왕적이란 소리 듣지 않을 수 있다.
석 달쯤 대통령실 이전이 늦어진다고 아무도 잡아먹진 않는다. 윤석열 정부의 성공은 초기에 결정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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