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장관급 인사 4명이, 더구나 그 중 3명은 인사 청문회에 오르지도 못하고 낙마했다. 이 정도면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사퇴는 아니어도 적어도 사과는 했어야 마땅했다.
윤 대통령이 뻑 하면 비교하는 문재인 정부의 첫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 임종석도 사과에 인색하진 않았다.
심지어 낙마가 나오기 전에,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와 강경화 외무부 장관 후보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의 위장전입 문제가 불거지자 그는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5월 26일 대통령 취임 16일 만에.
●16일 만에 인사 사죄한 임종석 비서실장
문 정권이 대선 기간 중 제시했던 공직진입 원천 저지 5대 원칙(병역면탈·부동산투기·세금탈루·위장전입·논문표절)을 수정하겠다며 임종석은 “저희가 내놓은 인사가 국민 눈높이에 미치지 못해 국민께 죄송스러운 마음”이라고 했다(그러면서 “빵 한 조각, 닭 한 마리에 얽힌 사연이 다 다르듯, 관련 내용 또한 들여다보면 성격이 아주 다르다”고 덧붙여 매를 벌기는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김용준 총리 후보자부터 장차관급 6명이 낙마하자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은 2013년 3월 30일 “새 정부 인사와 관련해 국민께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인사위원장으로서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대통령 취임 후 한달 5일 만이다.
윤 대통령 취임 두 달이 넘도록 사과는커녕 존재감조차 없는 김대기 실장에 비하면 신사였던 셈이다.
● 심지어 새누리당은 청와대 인사 참사 질타
그러나 허태열의 사과는 청와대 대변인을 통한 ‘대독(代讀) 사과’였다. 그러자 당정청 워크숍에선 인사 참사를 놓고 여당의 질책이 쏟아졌다. 지금 국민의힘에선 감히 언급도 못하는 비판이 당시 새누리당에서 쏟아졌던 거다.
현재 대통령실 부대변인이고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이재명은 2013년 4월 1일자 우리 신문에 이렇게 썼다.
허태열 비서실장은 당정청 워크숍에서도 여당의 질책이 이어지자 “제대로 대통령을 보좌 하는지 자문할 때 여러 미흡함이 많다”며 “따가운 질책, 공포스러운 질책을 듣고 통렬히 반성한다. 책임을 통감하며 정말 죄송하고 잘하겠다”고 거듭 사과했다.
결국 허태열은 물러났다. 대통령 취임 5개월 만에 비서실장 포함 수석비서관 4명이 경질됐기 때문이다(결과적으로 후임 김기춘 실장이 잘했다고 평가할 순 없다. 너무 잘 모셔 탄핵까지 겪게 됐으니…). 대통령중심제에서 대통령비서실장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얘기다.
● 독재정권에서도 비서실장은 막강하다
‘파워는 권력자와의 지근거리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정부조직법 제14조 ①항은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하기 위하여 대통령비서실을 둔다고 간단하게 돼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신임 여부 또는 의지에 따라 비서실장의 역할과 영향력은 얼마든지 달라지는 법이다.
민주시대에 박정희교(敎)를 신봉한 이후락(1963~1969) 같은 비서실장을 둘 순 없다. 대통령 뜻을 받들어 3선 개헌까지 온몸을 바쳐 도왔고, 이후 역사는 돌아보고 싶지도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서실이 ‘인의 장막’을 쳐선 안 된다고 강조한 건 전두환 신군부 때였다(함성득 ‘대통령 비서실장론’). 참모 보다 지휘관으로 살아온 군 경력 영향 때문이었을까.
전두환은 첫 비서실장으로 주미대사를 지낸 김경원을 발탁했다. 방미로 정통성을 인정받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서다. 김경원은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의 새세대육영재단 설립을 막으려 애를 쓰기도 했다. 실세 박철언 당시 법률비서관을 통해 기부금 상한선을 두는 것까진 해냈으니 큰일을 한 셈이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노재봉은 직언은 물론 장관 인선까지 바꾼 실세 비서실장이었다.
● 대통령실 군기는 누가 잡는가
1998년 2월 외환위기 와중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민정당 출신 김중권 비서실장을 기용해 주변을 경악시켰다. 적의 진영에서 비서실장을 데려온 격이다. 김영삼 정권의 실패를 반복해선 안 된다고 다짐했던 김중권은 1년 9개월 간 DJ의 눈이자 칼이자 입이 되어 동교동 DJ 가신은 물론 DJ 아들들의 국정 개입을 철저히 차단했다.
결국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꼽는 대통령실장의 자격 중 첫 번째가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미국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고 최연소 국방장관이었던 도널드 럼스펠드가 만든 ‘럼스펠드 원칙’도 대통령에게 날카롭게 짖어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대통령을 제왕처럼 여기는 우리나라에선 대통령을 대신해 욕먹고, 대통령실 군기를 잡고, 악역이 필요할 때 주저 않고 나서는 비서실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윤 대통령은 김대기 비서실장을 발탁한 배경으로 “경제전문가이면서 정무감각을 겸비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경제상황에 그가 어떤 경제비법을 내놨는지, 어떤 정무감각을 발휘했는지 알 수 없다. 장관급 인사가 줄줄이 낙마했는데도 비서실장은 도대체 단 한번도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인 적도 없다.
●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눈과 귀’ 역할 하고 있나
대통령실 소속 인사비서관의 아내가 대통령부속실 취업을 하려다 대통령 부부의 스페인 출장에 공군 1호기를 버젓이 타고 돌아왔다. 윤 대통령의 외가 6촌 친척 최모 씨가 대통령실 선임행정관으로 채용돼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국민의 눈에는 ‘공정과 상식’에 어긋난다고, 비서실장은 대통령에게 직언한 적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대통령 직무수행 지지율이 30%대로 내려앉았으면, 대통령실장은 비상을 걸었어야 한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약식기자회견)이 아무리 ‘소통’이라 해도 “대통령 처음 해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 정권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어요?”처럼 국민 억장을 무너뜨리게 하는 어법이면, 고쳐야 한다고 쓴소리 했어야 한다. 대통령실에서 여러 번 건의했음에도 대통령이 안 들었으면, 비서실장은 직을 걸고라도 개선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대통령한테 스피치 선생님이라도 붙이든지!
지금 항간에선 검찰 출신 대통령에겐 무서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한걱정을 한다(앗! 김건희 여사 빼고).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바른 눈과 귀 역할을 못할 거면, 더 이상 세금 축내지 말고 물러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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