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들이 취임 후 며칠 만에 여야 지도부와 만났는지 세어본 날짜다. 문재인·박근혜·이명박·노무현 대통령은 각각 10일, 한 달 반, 두 달, 15일 만에 여야 원내대표, 또는 당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해 회동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 아직 만나지도 못했다. 취임 석 달이 가까워 오는데도.
물론 시도는 있었다. 국회 시정연설을 했던 5월 16일, 3당 대표 및 원내대표와 국회와 대통령실 딱 중간인 마포에서 ‘돼지갈비 만찬 회동’을 하자고 제안했다는데 무산됐다. 더불어민주당이 다른 일정을 이유로 불참을 밝혔다는 건데 그 뒤 진실공방에 감정싸움까지 불거졌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8월 중 윤 대통령과 국회 의장단 만찬을 추진하겠다고 25일 기자들에게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출신 김진표 국회의장과의 만남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그보다 야당과의 만남이 더 시급한 것 아닐까.
● 야당과의 회동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그까짓 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2017년 5월 19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여야 5당 원내대표와 상견례를 겸해 마련한 오찬 회동은 우리 국민에게 봄꽃 같은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듬해 개헌,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구성, 검찰·국가정보원·방송 개혁 국회 논의 등등 성과도 풍성했다.
지금 같은 여소야대 시절, 대통령은 먼저 감나무 아래까지 나와 참석자들을 기다렸고, 상석 없는 원형 테이블을 설치했으며, 통합을 의미하는 비빔밥을 대접했다. 물론 탁현민 같은 선전 전문가의 화려한 연출이 가미됐을 터다. 하지만 ‘우리 이니’ 지지도와 ‘협치’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데는 나름 큰 몫을 했던 게 사실이다.
국정상설협의체 구성이나 검찰개혁 국회 논의 같은 회동 성과도 실제로 이뤄지진 못했다. 하지만 그건 그 다음 일이고, 일단 만나는 게 중요하다. 이미 윤 대통령은 역대 최장 기록을 깼다. 취임 후 야당 지도부를 가장 늦게 만나는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 국회 협조 없이 국정개혁 어렵다
윤 대통령도 연금개혁·노동개혁·교육개혁 같은 정부의 국정과제가 국회 협조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22일 장·차관 워크숍에서 윤 대통령은 “국회가 대한민국의 두뇌 역할을 하고 있다”며 각 부처 장·차관들에게 국회와 소통을 많이 해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참 이상하다. 대통령이 왜 국회와 직접 소통은 하지 않고 장·차관들에게 지시만 하는 것인지. 11일 한덕수 총리와 오찬을 겸한 주례회동에서도 “각종 현안 및 법안에 대해 국회와 상시 소통하고 설명하고 의견을 구하라”고 당부 했었다.
국회 시정연설에서 “법률안, 예산안 뿐 아니라 국정의 주요 사안에 관해 의회 지도자와 의원 여러분과 긴밀히 논의하겠다”고 다짐했던 윤 대통령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바로 의회주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를 했으면, 대통령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면 안 되나 말이다.
남의 나라 얘기이긴 해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달랐다. 미국 발 글로벌 금융 위기 초반인 2008년 1월 취임한 그는 경제회복법을 하루라도 빨리 의회 통과시키려고 하원 공화당 코커스에 대통령 최초로 참석해 법안을 설명하기까지 했다. 2009년 1월 상원 통과에 필요한 61표 중 공화당 3표 확보를 위해선 온건파 의원 셋을 직접 만나 일주일을 구슬리고, 조르고, 달래야했다고 자서전 ‘약속의 땅’에 소개했다.
● 대통령은 입법·사법·행정부 중 행정부의 수반
공교롭게도 여당과 제1야당 당 대표가 ‘유고’ 상황이긴 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양당이 같은 처지라는 사실이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가 20일 국회 대표연설에서 탄핵까지 언급한 것이 대통령으로선 불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직접 얼굴을 맞대야 한다. 윤호중 민주당 전 비대위원장도 김건희 여사로부터 “아직도 제가 쥴리라고 생각하시나요”라는 말을 직접 듣고는 활짝 웃었지 않았나.
혹시나 대통령이 여야 그리고 국회 꼭대기에 있는 구름 위의 존재라고 여겨 회동을 꺼리는 건 아니길 바란다. 헌법 66조①항은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고 돼 있다. 원수(元首) 즉 ‘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권력을 지니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인 것은 외국에 대해 국가를 대표할 때이고, 나라 안에서는 입법부·사법부·행정부 가운데 행정부의 수반(首班·반열 가운데 으뜸가는 자리)이다.
3월 10일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해단식에서 당시 윤 대통령 당선인은 “‘윤석열의 행정부’인 동시에 국민의힘이라는 여당의 정부가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우리도 ‘윤석열 정부’보다 ‘윤석열 행정부’로 고쳐 쓰면 좋겠다. 그러면 입법·행정·사법의 기능을 나눠 맡는 세 정부 사이의 민주적 균형도 단단해질 수 있을 것 같다.
● 취임 석 달 만에 대통령 휴가 그리 급한가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두달 만에야 미국 일본 순방을 다녀온 결과를 설명한다며 여야 지도부 회담을 마련했었다. 윤 대통령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서 돌아왔을 때 기회를 만들 수 있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늦어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음달 초 휴가부터 간다니 국민은 억장이 무너진다.(민간으로 치면 취업 석 달 만에 휴가 챙기는 수습 같다…).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 회동은 미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것이다. ‘어대명’(어차피 대표가 이재명)이 될 경우 또 시간을 끌게 될지 모른다. 그때도 여당 대표는 유고 상황일 터이므로 균형이 맞지도 않는다. 차라리 양당이 비슷한 처지일 때 회동하는 게 낫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살아생전 김진표 국회의장에 대해 ‘가장 유능한 공무원’이라고 극찬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해결책을 찾았던 공직자라는 거다. 국회의장단과의 회동을 할 거면, 여야 원내대표도 함께 초청해 협치의 첫걸음을 딛기 바란다. 그래서 국민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것이 국민을 위한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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