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길게 못 살 것 같다. 독한 글 쓰고 험한 욕 먹으면서 제 명대로 살 리 없다. 26일자 신문에다 ‘정실인사는 부패다’ 칼럼을 쓰고 나서도 나는 속이 쓰렸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알고 보면 ‘김명수가 망친 대법원’을 개혁할 적임자라는 중학교 동창 카톡을 보니 장이 더 꼬이는 듯했다(그는 같은 서울대 법대 80학번이다). 그럼 국회에서 임명동의안 부결당하지 말아야 할 게 아니냐고!
또 다른 변호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법정상화를 시킬 수 있는 정통 법관이라고 했다. 그들은 공직자 재산등록 누락이나 세금 탈루 같은, 민간인에게 예민한 문제엔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알겠다. 윤석열 정부에서 왜 국민 억장 무너지게 만드는 인사가 자꾸 이어지는지. ‘그들 눈높이’에선 그런 게 문제로 안 뵈는 거다.
왜 재산신고 누락, 부동산 보유, 증여세, 이해충돌, ‘부모 찬스’ 문제가 장관 후보자들한테서 계속 나오느냐는 야당 질의에 11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렇게 답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들을 주요 보직에 쓸 때는 대개 비슷한 문제가 나오게 돼 있다”고.
● 상류층엔 그 정도 부패가 보통인가
가히 핵폭탄급이다. 털지를 않아서 그렇지, 이 정도 문제 있는 고위공무원은 수두룩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말이다.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공직자윤리위원회는 고위공직자의 등록재산을 심사해야 하고 거짓 기재한 경우, 빠트리거나 잘못 기재하는 경우엔 해임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균용처럼 10년 이상 재산등록을 빠트리는 게 별일 아니라고?
검찰 출신 장관이 그리 본다면 검찰 출신 수두룩한 공직기강비서관실, 심지어 윤 대통령도 같은 사고일 게 분명하다. 어쩌면 일만 잘하면 되지, 그까짓 법률 위반이 뭔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른다(같은 ‘패밀리’끼리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할 수 있어서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면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이면서도(2022년엔 13등으로 떨어지긴 했다) 국제투명성기구(TI) 부패인식지수가 OECD 38개국 중 22등, 하위권에서 맴도는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경제적 성공이 강조되는 물질주의 문화, 불평등한 사회 속에 부패가 창궐하는데 폐쇄적 사회연결망, 가족주의, 연고주의가 부패의 기회구조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신동준 국민대 교수 2023년 ‘부패의 원인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 그러고 보니 그려지지 않는가. “우리가 남이가” 같은, ‘아는 형님’ 있어 끈끈하고 든든한, 우씨 그들끼리는 살기 좋은 더러운 세상.
● 애들 볼까 겁나는 인사청문회
그러나 평범한 국민들은 그렇게 간이 크지 않다. 한동훈 발언은 정직하게 세금 내며 살아온, 그러면서도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다. 또 다른 원로 법조인도 “사람을 안 찾아서 그렇지 다 그렇진 않다”고 했다.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은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실에서 추천 후보를 지명하면 1차 검증 자료를 제공할 뿐이라고 했다. 이 말은 즉, 대통령실에서 ‘문제 있는 사람들’만 쓰려 한다는 얘기다. 윤 대통령이 최고의 인재들을 폭넓게,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라도 찾아 쓸 생각은 않고 그저 ‘아는 사람’ 속에서만 지명하니(이것이 정실인사이고 부패의 일종이다), 또각또각 말 잘하는 한동훈이 ‘싸가지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닌가.
설령 대통령 주변에선 다 그렇게 산다 해도 그게 옳은 건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이미 공직재산신고 누락, 부동산 보유, 증여세 미납, 업무 관련 특혜와 이해충돌, 부모 찬스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면, 정말 입에 올리고 싶진 않지만 전 법무부 장관 조국은 왜 1심 유죄를 받았는지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진짜 그런 문제가 있는데도 처벌은커녕 장관으로 출세하는 ‘윤석열 세상’이 옳다면, 애들 교과서를 바꿔야 할 판이다. 그런 청문회를 볼 때마다 보통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하는지, 부모 찬스 없는 청년들이 얼마나 절망하는지 밴댕이 소갈딱지만큼이라도 헤아려본다면,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은 다 그렇다”며 그따위 인사를 계속할 순 없다.
● ‘반듯한 장관감’ 폭넓게 왜 못 찾나
만일 꼭 필요한 인재인데 국민 눈높이에선 문제 있을 것 같다면, 대통령실에서 쓰기 바란다. 그리고 청문회가 TV로 생중계되는 장관 자리엔 ‘반듯한’ 인물을 앉히는 거다. 그래야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고, 체제 정당성을 믿게 되고, 나도 성실하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 장관 후보자가 유능한 사람이면 더 고맙다. 공무원들은 정신을 번쩍 차릴 것이고 청년들 가치관도 달라질 것이다. 이 정부는 연고주의 아닌 능력주의라는 믿음이 생긴다면, 대통령 지지도는 자연히 올라간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북유럽 같은 부패 없는 선진국에서 살 수도 있다.
(잠깐 막말을 써도 된다면, 어차피 중요한 일은 대통령실에서 그리고 대통령이 내려보낸 실세 차관이 다 하는 윤 정부다. 장관한테 힘을 실어주지도 않으면서 굳이 문제 있는 인물을 임명해 ‘보수=부패’ 이미지를 부풀린 건 없지 않은가.)
신문 칼럼 끝에 나는 ‘차라리 국민들 속 뒤집히지 않게 인사청문회를 없애는 게 낫다’고 썼다. 인사청문회를 하는 나라는 대통령제인 미국, 필리핀, 우리밖에 없다. 모처럼 전임 대통령 호소를 받아들여 사전 인사검증과 공개청문 2단계로 바꾸는 것도 방법이다. 신문 공간이 모자라 못 썼지만 사실, 내가 그 뒤에 붙이고 싶었던 문장은 이것이었다. ‘아니면 반듯하고 유능한 장관감을 갖다 앉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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