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땐 “프로”…삶은 “즐겁게”. 30년 전인 1993년 4월 동아일보 창간 73돌 기획으로 열 달간 연재했던 ‘신세대’ 시리즈 첫 회 제목이다. 좀 유치한가(맞다. 내가 썼다ㅠㅠ). 젊은 날 한껏 모양을 내고 찍었던 빛바랜 앨범 사진을 들춰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당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동아일보답지 않게 톡톡 튄다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73년생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6일 위원장 수락 연설에서 젊은 날 서태지와 아이들을 소환했다. “동료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줄 사람과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사람들이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92년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라고 외친 ‘환상 속의 그대’에서 따왔다는 후문이다.
‘신세대 30주년 기념 도발’을 세 줄로 줄이면 이렇다. ① 신세대는 모든 청춘의 공통점 말고도 특이점이 있었다. ② 잘 자란 신세대가 한동훈이라면 퇴행적 그룹은 한총련이다. ③ 주류가 되지 못했다는 신세대, 이제 다시 뛴다.
●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왜 30년 전 ‘신세대’였을까. 93년 신군부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종식시키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71%의 국정지지율로 벅차게 출범했다. 91년 소련이 무너졌고(좌파는 꼭 이걸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졌다고 한다)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로 기성세대에 문화충격을 던진 다음이었다.
미국선 베이비 부머 세대의 2세, 도무지 알 수 없는 X세대가 등장했다. 생애 전반기에 맞는 ‘첫 번째 인상’이 개인의 가치와 정체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우리도 70년 전후 경제성장기에 태어났고 교복자율화와 민주화 속에 성장해 자의식과 욕망과 대중문화에 진심인, 생전 처음 보는 인류를 탐구해볼 필요가 있었다.
시리즈 첫 회 부제가 ‘자유와 개성의 삶’이다. 태양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으며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심지어 직장에서도 “나는 나”라고 주장했던 ‘한국 최초의 개인주의 세대’가 그들이었다. 88서울올림픽과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신세대에게 철학이 있다면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 무렵 신세대 여성을 사로잡았던 불후의 광고 카피가 있다. 채시라가 당당한 직장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해 다수 여성들의 롤 모델로 등극한 광고.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이 정의(正義)”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청춘이 다 갖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다. 5회 직장인 편에서 부하 직원에게 업무를 맡겼더니 첫마디가 “안 될 것 같다”여서 놀랐다는 한 팀장의 하소연. 요즘 MZ세대의 ‘3요’(이걸요? 제가요? 왜요?)에 쇼크 먹는 임원들 얘기와 흡사한가.
“큰 정의(Great Cause)의 시대는 가고 이제 ‘내가 열심히 사는 게 정의다’라고 믿는 일상의 정의가 정착되는 것이 신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당시 서울대법대 안경환 교수는 법대에선 그게 공부로 나타난다고 했다. “부모가 잘난 것도 내가 잘난 것과 마찬가지고, 그걸 활용하는 것도 능력이며 기회”라는 계급의식도 신세대는 스멀스멀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주류로 성장한 신세대 중 한 사람이 국힘 비대위원장 92학번 한동훈이 아닐까 싶다. 심규진 스페인IE대학 교수는 최근 저서 ‘73년생 한동훈’에서 “한동훈의 능력주의 서사엔 기존의 능력주의가 가지고 있는 촌스러운 ‘짠내’, 동정과 눈물을 요구하는 신파가 없다”고 썼다.
인생이 축복이고 혜택 받았다고 여기는 기득권층이라면, 어렵게 자랐다고 세상에 적개심을 갖는 그래서 반칙과 탈법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과는 달라야 한다. “한동훈의 확고하고 도덕적이며 귀족적인 자의식은 자신보다 낮은 곳에 있는 자들에 대한 책임의식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연결된다”고 심규진은 썼다. 책임의식만으론 부족하다. 동료시민 앞에 보여주고, 정책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지 온 국민이 주시하는 상황이다.
● 민주당에 어른대는 97운동권 한총련
신세대 시리즈에서 놓친 부분이 93년 봄 출범한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었다. 시리즈를 거의 전담했던 내가 운동권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총련이 너무나 마이너였던 이유가 크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92년 단행본 ‘역사의 종언’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승리를 선언했고, 극단적 좌파 이념과 학생운동은 신세대 관심사와 거리가 멀었다. 제일기획부설 마케팅연구소의 여론조사결과 60%이상의 20대 젊은이들이 아예 정치는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했다.
젊은 세대라고 다 미래를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젊음의 폭발력으로 역사의 퇴행을 몰고 오기도 한다. 1928년의 독일은 청년들이 주축이 된 나치 돌격대가 바이마르 민주주의를 황폐화시켰고 곧이어 나치 체제가 확립되면서 독일의 민주주의가 사망했다고 신진욱은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지적했다.
세계화 바람 속에서도 세상 변화에 눈감은 한총련은 출정식에서 “외세와 독재에 맞선 전대협의 투쟁정신을 계승해 자유·민주·통일을 향한 백만학도…”를 외쳤다. 94년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로 표어를 바꾸면서 한총련은 더 외골수로, 강경 주사파로 달려갔다. 97년 민간인을 프락치로 몰아 때려 숨지게 한 이종권 사건과 이석 사건 뒤에 한총련 간부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측근을,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내년 총선 공천을 노리는 건 또 무슨 퇴행인가.
● 그들이 유독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유
93년 12월 시리즈 마지막은 좌담으로 마무리된다. 큰 제목은 ‘사회변화 이끄는 전위(前衛) 부상-합리 바탕 기존질서 해체 성향’. 장상수 당시 삼성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기업도 신세대에 맞춘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며 “정보지식사회로 나아가는 미래사회의 흐름을 주도할 세대가 지금의 신세대”라고 했다. ‘주류 질서의 전복자’ 서태지와 아이들이 ‘하여가’를 발표한 것도 93년이었다. “예예예예예 야야야야야 예이예이예이 야이야/너에게 모든 걸 뺏겨버렸던 마음이/다시 내게 돌아오는 걸 느꼈지…”
‘문화 대통령’으로 군림하던 그들이 96년 1월 돌연 은퇴를 발표했다. 그리고 97년 외환위기가 닥쳤다. 한국사람 모두에게 IMF사태는 충격이었지만 당시 신세대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대학 졸업 무렵 취업절벽을 맞았거나 부친의 사업 실패 또는 명예퇴직으로 자신의 미래도 암울해졌다는 서사가 적지 않다.
전례 없이 커졌다가 갑자기 포기된 욕망은 크나큰 정신적 내상으로 남는다. 특히 보수정부에서 IMF사태가 닥쳤고, 2009년 또 다른 보수정부에서 신세대가 만들었던 대통령 노무현이 목숨을 끊었다(고 그들 일부는 믿는다). 신세대가 40대가 된 지금 유독 반(反)보수층, 민주당 지지층이 많은 것도 이 같은 서사와 무관치 않다.
● 그런 세대는 없다? 신세대는 살아있다?
모든 세대는 자기들 세대가 가장 불행하다고, ‘낀세대’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40대는 특히 더해서 586세대와 MZ세대 사이에 꽉 끼어 사회 주류로 뜨지 못하고 늙어가는 ‘낀낀세대’라는 소리도 나온다. 고령화·정년연장 덕에 86세대는 여전히 활동하는데 젊은 날 신세대였던 그들은 승진도 늦고, 권한도 누려보지 못한 채 MZ세대에 밀려나고 있다는 불만도 부글거린다.
중앙대 신진욱 교수(사회학)는 2022년 ‘그런 세대는 없다’고 아예 책 제목에 썼다. 586으로 뭉뚱그려진 1960년대 생 중 4년제 대학에 간 사람은 12%에 불과했다. 정치권에선 86운동권이 오랜 영화를 누리는 바람에 한총련 출신 97(90년대 학번·70년대 출생)그룹이 오래 굶었는지 몰라도 요 몇년 새 집값 폭등 때 자산 최상위층이 늘어난 쪽은 3040대였다. 요컨대 세대 내 불평등과 계층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지 (젊은층) 꿀 빠는 꼰대세대와 얼떨결에 패싱 당한 낀세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분석이다.
둘러보면 맞는 말이다. 30년 전 386이 지금 모두 기득권을 누리는 것도 아니고, 30년 전 신세대가 현재 모두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당대의 두드러진 현상을 취재 보도하는 게 저널리즘이고, 마침내 30년 후 확실한 주류로 뜨고 있는 신세대를 목도하고 있다. 30년 전 신세대로 열심히 살아온 그대들, 그동안 안녕들 하셨던 거죠?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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