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대련’ 이었으면 좋겠다. 태권도나 검도에서 양측이 사전에 약속한 방법으로 공격-방어해서 기술을 연마하는 것. 이관섭 대통령비서실장은 21일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 사퇴하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뜻을 전했고, 한동훈은 “국민 보고 나선 길”이라며 거부해 한방씩 주고받았다. 신문없는 일요일 인터넷판이 발칵 뒤집혔다.
대통령비서실장이 백주대낮에 집권당 대표를 만나 “그만두라”는 대통령 말을 전했다고? 안 그래도 수직적 당정관계가 문제여서 은밀히, 쥐도 새도 모르게 작업해도 모자랄 판에 원내대표까지 같이 만났다고?
이 정도면 국민들(한동훈 표현에 따르면 ‘동료 시민’) 다 보고 듣고 아시라고 대놓고 저지른 거사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다음날인 22일 윤 대통령은 예정됐던 민생토론회에 30분 전 요란하게 불참을 통보했다. 감기 기운 때문이라지만 덕분에 한동훈은 선민후사(先民後私) 정치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은…선처후민(先妻後民)으로 지질하게 찍힐 수도 있겠으나 미리 짠 약속 대련이면, 희생과 헌신의 대통령이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말만 안 했을 뿐.
● 6·29를 돋보이게 해준 ‘4·13 호헌’
1987년 노태우의 6·29 선언이 혁명적으로 보였던 것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4·13 호헌’ 특별담화가 있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당치 않은 비유라는 것, 안다. 하지만 하도 ‘한동훈의 6·29’를 고대하는 이들이 많아 되돌아보자는 거다.
당시 신민당의 온건 대표 이민우는 전두환이 띄운 내각제 개헌론에 솔깃해 있었다. 이에 김영삼 김대중 양김 씨가 분기탱천 탈당해 혼돈의 창당 정국이 이어졌다. 전두환이 4월 13일 “개헌 논의 유보, 현행 헌법으로 연내 대선 실시”를 발표하자 야권은 “장기집권 음모”라며 격렬히 반발했다.
마침내 6월 16일 전두환은 ‘직선제 개헌 요구 완전수용’의 결심을 굳혔다고 회고록에 썼다. 그러자 그간 잠 못 이루며 고심했던 일이 한낱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며 마음이 한없이 평화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런 전두환의 각본에 노태우는 “제가 직선제 수용을 포함한 민주화조치를 건의 드리면 각하께서는 크게 노해서 호통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욱 효과가 있겠다”고 말했다(전두환은 즉답하지 않았다).
● 민생보다 김 여사가 그리 중한가
6·29와 4·13을 굳이 쓰는 이유는 좀 구차하다. 윤 대통령도 그러지 않았을까 믿고 싶어 전두환 회고록을 들여다 본 거다(영화 ‘서울의 봄’이 떠올라 또 굳이 밝히자면, 정권을 어떻게 잡았는가와 집권 후 어떻게 성과를 올렸는가는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대통령이 한동훈에게 온 국민 다 알게 “관두라”고 외치고, “국민 보고 나왔다”는 한동훈의 한 방을 먹는 약속대련을 펼침으로써, 말하자면 4·13 호헌 선언 같은 악역을 자처함으로써 한동훈에게 자신을 밟고 가는 모습을 만들어준 게 아닌가 믿고 싶은 거다. 그랬다면 마음도 한없이 평화로워졌을 듯하다.
그게 아니라면, 불길하다. 전두환은 그래도 헌법을 지키기 위해 호헌선언을 했던 것이었다. 윤 대통령은 무엇을 지키겠다고 있어선 안 될 당무 개입 의혹까지 일으킨단 말인가. 설마 부인 김건희 여사가 헌법보다 중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김 여사가 대통령에게 민생보다 중한 것은 분명하다. 22일 윤 대통령이 빼먹은 국정 행사가 하필 ‘국민과 함께 하는 민생 토론회’였다. 윤 대통령이 “첫째도 경제(민생), 둘째도 경제(민생), 셋째도 경제(민생)”이라며 해외순방도 민생에 역점을 뒀다고 강조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코로나도 아닌 감기 기운에 민생토론회를 빼먹었다고??
● 이순자 여사는 청와대 생활 점검했다
김 여사는 2022년 6월 서울 연희동으로 이순자 여사를 방문해 90분간 머문 적이 있다. 짧지 않은 시간,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여사도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편치만은 않은 영부인 역할을 했다.
단군 이래 최대 어음사기라던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진 것이 1982년, 전두환 집권 2년차였다. 장영자는 이순자의 작은아버지의 처제다. 그는 “사실상 나도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한 여자의 대담한 사기행각의 피해자”라고 회고록에 썼지만 사건이 종결되고 나서도 고슴도치처럼 온 몸에 비난을 받아야 했다. ‘큰 손’으로 온갖 부도덕한 사치와 이권에 개입하는 여자. 탐욕으로 가득 찬 권력형 부정부패의 온상…. 그래서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따로 헤어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고 회고록에 썼을 정도다(2017년 ‘당신은 외롭지 않다’).
그 아픔을 겪으면서 이 여사는 청와대 생활을 점검했다. 우선 주변에 정직한 충고를 부탁했더니 한참들 망설이다 ‘사치스럽고 나서기를 즐겨하는 권력 지향형의 여자’로 보인다고 말해주더라는 거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봐도 거부감이 생길만큼 TV에 자주 등장했다. 컬러TV 초기여서 한복에 금박을 박아 입었는데 너무 화려해 보이기도 했다. 조용히 공보수석을 만나 부탁했다. “행사 참석 횟수를 줄이고, 부득이 참석하면 TV화면에 내 모습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써달라”고.
● 국민 이간질 대통령실도 문제다
현 대통령실엔 민정(民情)이 없다. 그렇다면 참모진 하나하나가 민정이 돼도 모자랄 판에 충심만 가득해 비극이다. 대통령실은 “대통령 부부에게 접수되는 선물은 대통령 개인이 수취하는 게 아니라 관련 규정에 따라 국가에 귀속돼 관리, 보관된다”며 김 여사의 순결무구함을 방어하긴 했다.
헹. 대통령 관저의 반려견 토리가 웃는다. 그럼 윤 대통령은 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선글라스를 국가에 귀속해 관리, 보관하지 않고 자신이 쓰고 다니는지 묻고 싶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대통령 부부와 국민을 이간질하는 참모가 바로 세작 같다. 진심 대통령과 나라를 생각하는 비서실장이면, 대통령이 “그만 두라”고 전하라고 할 때 “그건 아닙니다”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윤 대통령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민생도, 법치도, 우리나라도 아니다. 오직 하나, 영부인뿐임을 온 세상이 알아버렸다. 참 대통령답지 않다. 우리가 기대했던 윤 대통령답지도 않다. 몰래카메라 불법촬영은 그것대로, 법대로 처벌하면 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한다면,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나. 우리는 다만 , 뻑하면 ‘격노’만 하는 대통령이 국민에게는 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전임 정권에선 살아있는 권력 앞에 굽히지 않던 사람이었다. 왜 용산-한남동 구중궁궐에 들어간 다음엔 국민을 이기려고만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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