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젊은이들이 하는 말이란다. ‘이총망(이번 총선은 망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1일 대국민 담화에 ‘애국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가슴을 친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긴 침묵 끝에 대통령이 앞에 나섰으면, ‘의대 2000명 증원’ 문제로 지치고 불안한 국민 심신을 풀어줘야 했다.
윤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계속되는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으로…국민들의 불편을 조속히 해소해드리지 못해 대통령으로서 송구한 마음”이라면서도 정부가 옳고 의사들이 틀렸다고 ‘나는 불통 대통령’ 같은 표정으로 51분간 원고만 읽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존재하는 기자들 질문받기는커녕 출입까지 막았다. 검찰총장도 이런 식으로 수사결과 발표를 하진 않는다.
그날 나는 총선 유세현장을 가보려고 국민의힘 서울 한 지역구 후보의 동선을 먼저 물어보고 있었다. 오전만 해도 곧 알려주겠다던 출입기자 말이 오후가 되자 달라졌다. ‘이총망’…대통령 때문에 이번 총선은 망했다는 분위기라며 오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 2년 전에도 자칭 ‘애국보수’ 애태우더니
2년 전 대선을 코앞에 두었을 때도 윤석열 당시 국힘 후보는 어지간히 지지자들 애를 태웠다. 잠깐 잊고 있었지만 윤 대통령은 혼자 힘으로 대통령 된 게 아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이 대선 2주 전인 2022년 2월 22일 깨졌는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의 지지율 차이가 달랑 1%포인트였다(윤 37%, 이 38%로 지고 있었다·갤럽 조사). 하도 답답해 2월 26일 ‘도발’에다 ‘윤석열은 안철수를 보쌈이라도 해오라’고 썼을 정도다.
지금은 이렇게 써야하나 싶다. “윤 대통령은 전공의들을 보쌈이라도 해오시라.” 원래 지지율도 안 챙기고, 공감 능력이 좀 떨어지는 대통령이라고는 한다(대통령 탈당을 주장했다 철회한 서울 마포을 함운경 국힘 후보는 대선 후보 시절 자신의 가게를 찾아왔던 대통령에 대해 “사실관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니까 국민들이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별로 신경을 안 쓰시더라”고 했다).
선거와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인식이다. 2021년 9월 이재명의 대장동 의혹이 터지면서 다시 뒤집힌 지지율은 김건희 여사의 허위이력이 불거졌는데도 한사코 사과도 안 하고, 국힘 내 갈등까지 폭발하면서 2022년 1월 초 26%(윤)-36%(이)까지 뒤졌다(죄송해요. 욕설 아니에요). 이걸 다시 뒤집은 것이 이재명 부인 김혜경의 과잉의전 논란이다. 공식선거운동 개시일 2월 17일 41%까지 올라갔던 지지율은 일주일 만에 또 뒤집혔다. 누가 누가 더 싫은가, 더 부도덕한가를 가리는 듯한 역대급 비호감 대선. 여론조사 공표 마지막 날인 3월 2일 지지율은 39%(윤)-38%(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12%였다.
● 대선 때도 1주일 전 후보 단일화
마침내 다음날 아침. 안철수가 ‘조건 없는 윤석열 지지’를 발표하고 후보를 사퇴했다. 대선 꼭 일주일 전이다. 전날 밤 마지막 TV토론회 뒤 윤석열과 머리를 맞대고 두 시간 반 동안 서로의 정치철학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는 거다. 그 장소가 이번 총선 전에 ‘책임을 지고’ 불출마를 선언했던 찐윤 장제원 의원의 매형 집이었다. 그리하여 결과는 48.56%(윤)-47.83%(이). 0.73%포인트. 역대 최소 격차였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2년 전 얘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아챘을 것이다. 총선이 코앞인 지금, 엄정한 ‘정치중립’을 해야 마땅한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의정갈등을 일으켰다 전격 해결에 나선 것이라곤 보지 않는다. 그러나 총선과 상관없이, 풀 것은 풀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의 생명, 젊은 의사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마침내 윤 대통령이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해 현장을 떠난 전공의들과 만날 모양이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비상대책위원회 조윤정 홍보위원장이 2일 브리핑에서 “박단 (전공의협의회장) 대표에게 부탁한다”며 “만약 윤 대통령이 박 대표를 초대한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나보라”고 말한 다음, 대통령실에서 신속하게 “대통령이 전공의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 제발 입을 닫고 귀를 여시라
만나거든, 윤 대통령은 제발 좀 듣기 바란다. 전공의 대표를 만나 또 혼자 계속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면, 꽝이다. ‘역시 대통령은 꼰대 중에 상꼰대…’ 젊은 의사들은 실망해 차갑게 마음을 닫을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안 만나는 것만 못하다.
전의교협 조윤정이 대통령과 전공의들의 만남을 간곡히 당부하는 말에 문제 해결의 단초가 담겨 있다. 그는 “대통령의 열정과 정성만 인정해도 대화는 시작할 수 있다”며 전공의들을 향해 “대통령의 열정을 이해하도록 잠시나마 노력해 달라”고 했다. 대통령을 향해서는 “우선 이 젊은이들의 가슴에 맺힌 억울함과 울음을 헤아려 달라”며 “대통령께서 먼저 (전공의들에게) 팔을 내밀고 대표 한 명이라도 딱 5분만 안아 달라”고 했다.
“의료 현장에서 밤낮으로 뛰어다니고 자정 무렵이 돼서야 그날의 한 끼를 해결해야만 했던, 새벽 컨퍼런스 시간에 수면 부족으로 떨어지는 고개를 가눠야 했던 젊은 의사 선생님들이 바로 지금까지 필수 의료를 지탱해왔던 분들”이라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조윤정은 브리핑 도중 목이 메면서 “법과 원칙 위에 있는 것이 상식과 사랑이라고 배웠다. 아버지가 아들을 껴안듯 윤 대통령의 열정 가득한 따뜻한 가슴을 내어달라”고 했다. 이보다 감동적인 말을 찾을 수 없어 그대로 옮기는 거다. 그렇게 대통령이 공감력을 키우고, 그리하여 대통령이 달라질 수 있다는 모습만 보여준대도…다수 국민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사족 1. 대통령과 전공의 간의 ‘조건 없는’ 만남을 요청했던 조윤정은 3일 “전공의에 대한 면허정지 처분 철회와 대통령 사과가 우선”이라고 밝히고 홍보위원장직을 사퇴했다. 하루새 얼마나 힘들었을지…이해한다. 그럼에도 만남은 이루어지길.
사족 2. 대선 일주일 전, 윤 대통령은 지금 잊었겠지만 절체절명의 시기에 후보직을 양보했고, 그 뒤 대통령실로부터 말 못할 수모도 겪었던 던 의사 출신 안철수 국힘 의원이 2일 대안을 제시했다. 의료계와 전문가, 시민단체, 국제기구로 구성된 협의체를 조속히 꾸리되 시간이 부족하면 의대 정원 확대 문제는 내년으로 넘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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