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2월 5일

민족자결주의 낳은 두 사람이 오늘의 세계를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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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월 21일 니콜라이 레닌이 사망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을 성공시킨 그 사람이죠. 54년의 길진 않았지만 불꽃처럼 타올랐던 생애였습니다. 20년 간 추방과 유형 망명을 거듭해야 했던 혹독한 탄압 아래서도 ‘최후에 웃는 자가 정말로 웃는 자’라며 혁명 의지를 굽히지 않았죠. 말년에는 총격을 당하고 병까지 앓으면서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레닌이 죽었다는 가짜뉴스가 잊을 만하면 나왔죠. 그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희망도 레닌 사망 뉴스가 반복되는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약 보름 뒤인 2월 3일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68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윌슨 하면 민족자결주의가 가장 먼저 떠오르죠. 그는 1918년에 각 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민주주의는 가능하며 모든 민족이 자결권을 가질 때 세계에 평화가 찾아든다고 외쳤습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4개조를 들고 제1차 세계대전의 처리방안을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에 직접 참석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특히 나라를 잃은 약소민족들은 민족자결주의를 복음이나 마찬가지로 여겼죠.



하지만 민족자결주의의 저작권은 윌슨이 아니라 레닌에게 있습니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전에 사회주의자라면 민족 간의 억압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사회주의는 완전한 민주주의이므로 어떠한 억압과 착취도 사라져야 한다고 했고요. 물론 서유럽 선진국에서 먼저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려면 후진국이나 식민지의 민족운동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생각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죠. 이런 배경 때문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민족자결주의를 먼저 앞세우자 윌슨이 부랴부랴 14개조를 제창하게 됐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민족자결주의는 일제 밑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민족자결주의가 없었다면 3·1운동의 불길이 그렇게 강렬하게 타오르진 않았겠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에 기울었던 배경에도 민족해방이 있었습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레닌의 공산주의든, 윌슨의 14개조든 상관없었죠. 여운형 같은 이는 1918년 상하이에서 윌슨의 특사인 찰스 크레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돕겠다는 말을 듣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고 동분서주했습니다. 1922년이 되자 여운형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해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했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박은식은 러시아혁명은 ‘세계개조의 제일 첫 번째 동기’로, 민족자결주의는 ‘세계개조의 진보’로 각각 평가했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2월 5일자 사설 ‘윌손 씨를 조함’은 새해에 2대 위인을 잃었다며 윌슨을 민주주의의 최고 이상가이자 완성자로, 레닌은 사회주의 실현의 제일인자로 각각 소개했습니다. 사설이 ‘두 사람의 이상은 뒤에 남은 인류의 손으로 조만간 세상에 실현되고야 말 것’이라고 낙관했던 점은 당시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 있죠. 동아일보는 레닌 사망 직후 러시아의 문호 막심 고리키의 ‘레닌’을 5회에 걸쳐 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말 그대로 이상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윌슨은 유럽의 몇몇 약소민족에 집중했고 그마저도 현실 정치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실망감만 낳았죠. 파리강화회의에 간 우리 대표를 인정해준 강대국은 한 나라도 없었죠. 레닌 역시 식민지 민족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그 이후 소련의 역사는 약소민족의 생존보다 자국의 이익 우선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냈을 뿐입니다. 단적인 사례가 영문도 모르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해 말 못할 고난을 겪은 고려인들의 운명이었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많은 소수민족들이 주변 강국의 발톱 아래 숨죽인 채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기사입력일 : 2021년 02월 09일
윌손氏(씨)를 吊(조)함
民族自決主義(민족자결주의)의 父(부)

一(1)
民族自決主義(민족자결주의)의 提唱者(제창자) 歐洲大戰亂(구주대전란)의 仲裁者(중재자) 國際聯盟(국제연맹)의 創案者(창안자)인 윌손氏(씨)는 마츰내 逝去(서거)하엿다. 비록 그의 時代(시대)가 이미 經過(경과)하엿다 하더라도 一九一八(1918) 一九一九(1919) 兩年(양년)에 氏(씨)가 民族自決(민족자결)과 非賠償(비배상) 非合倂主義(비합병주의)를 提(제)하고 歐洲(구주)에서 『正義(정의)와 人道(인도)』를 爲(위)하야 獅子吼(사자후)하던 當時(당시)를 追憶(추억)할 때에 누구나 『아々 人類(인류)의 一偉人(일위인)이 갓도다』 하는 嘆息(탄식)을 禁(금)치 못할 것이다.

二(2)
實際(실제) 政治(정치)의 手腕(수완)、그 中(중)에도 外交(외교)의 手腕(수완)에 關(관)하야 或(혹)은 氏(씨)를 理想家(이상가)라、空想家(공상가)라고 是非(시비)의 評(평)을 하는 者(자)가 잇거니와 우리는 氏(씨)를 一個(일개)의 實際(실제) 政治家(정치가)로써 評(평)하고 십지 아니하고 一代(일대)의 人類(인류)의 理想(이상)을 代表(대표)하는 理想家(이상가)로 氏(씨)를 敬仰(경앙)하고 십다. 비록 氏(씨)가 講和(강화)의 基礎條件(기초조건)으로 提唱(제창)하고、氏(씨)만 提唱(제창)하엿슬 뿐 아니라 關係列國(관계열국)이 悅服的(열복적)으로 承認(승인)까지 하엿던 有名(유명)한 十四個條(14개조) 그 中(중)에도 民族自決主義(민족자결주의)와 非賠償(비배상) 非合倂主義(비합병주의)가 英(영)、佛(불)、伊(이)、日(일) 等(등) 所謂(소위) 强大國(강대국)의 傳統的(전통적)인 帝國主義的(제국주의적) 『物慾(물욕)』 때문에 餘地(여지) 업시 破壞(파괴)가 되엇고 그의 最後(최후)의 努力(노력)인 國際聯盟(국제연맹)조차도 海牙會議(해아회의)의 뒤를 따라 歲月(세월)이 갈사록 一個(일개) 歷史的(역사적) 遺物(유물)에 不過(불과)하는 慘狀(참상)을 當(당)하엿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氏(씨)의 理想(이상)이 空想(공상)이 되어 버렷다고 우서버릴 수는 업다. 모든 偉大(위대)한 理想(이상)이 그러한 모양으로 氏(씨)의 理想(이상)도 人類(인류)에게 永遠(영원)히 끄지 못할 火熖(화염)을 던지고야 말앗다.

三(3)
그 火熖(화염)이란 무엇인가. 곳 民族(민족)은 大小(대소)를 不關(불관)하고 各各(각각) 自己(자기)의 運命(운명)을 自己(자기)가 決定(결정)할 權利(권리)가 잇다 하는 眞理(진리)다. 비록 純全(순전)히 이 主義(주의)의 體現(체현)으로만 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表面(표면)의 辭令(사령)만으로라도 이 主義(주의)에 依(의)하야 체크슬로바키아、波蘭(파란)、芬蘭(분란)、猶太(유태) 等(등) 多數(다수)의 小弱民族(소약민족)이 오래ㅅ동안 일엇던 民的族(민족적) 自由(자유)를 恢復(회복)하얏고 其他(기타)의 小弱民族(소약민족)들도 이 氣勢(기세)를 乘(승)하야 民族自決(민족자결)의 精神(정신)과 運動(운동)이 旺盛(왕성)하게 되엇다. 民族自決(민족자결)、따라서 나오는 民族自立(민족자립)은 인제는 時間問題(시간문제)요 理論問題(이론문제)가 아닌 것은 人類(인류)의 正論(정론)이어니와 이것을 이러케 한 功績(공적)은 윌손氏(씨)에게 돌릴 수밧게 업는 것이다.

四(4)
特(특)히 우리 朝鮮人(조선인)은 氏(씨)에게 對(대)하야 남달리 愛敬(애경)의 感情(감정)을 가진다、그것은 氏(씨)가 우리를 爲(위)하야 特別(특별)한 援助(원조)를 하엿던 까닭이 아니오 오직 氏(씨)의 主唱(주창)한 民族自決主義(민족자결주의)가 우리 民族(민족)의 胸線(흉선)에 共鳴(공명)된 까닭이다、이 까닭에 우리가 氏(씨)를 哀悼(애도)하는 情(정)은 自別(자별)한 것이 잇슬 것이다、『正義(정의)의 친구』、『弱者(약자)의 친구』를 일허버린 슬품을 우리는 앗김 업시 發表(발표)할 것이다.

五(5)
우리는 新年(신년)에 二大偉人(2대위인)을 失(실)하엿스니 곳 레닌과 윌손이다、이 人類(인류)의 兩(양) 偉人(위인)은 또한 人類(인류)의 兩大時代(양대시대)를 代表(대표)하는 者(자)니 우리가 只今(지금) 哀悼(애도)하는 윌손氏(씨)는 民主々義(민주주의)의 最高(최고) 理想家(이상가)며 同時(동시)에 完成者(완성자)라 할 것이오 얼마 前(전)에 이미 哀悼(애도)한 레닌氏(씨)는 社會主義(사회주의) 實現(실현)의 第一人(제일인)이다、둘이 다 이미 世上(세상)을 떠낫거니와 두『사람』의 理想(이상)은(아마 하나로 融合(융합)하야) 뒤에 남은 人類(인류)의 손으로 早晩間(조만간) 世上(세상)에 實現(실현)되고야 말 것이다. 이러케 생각할 때에 우리는 偉人(위인)의 死(사)를 哀悼(애도)하는 同時(동시)에 一種(일종)의 神聖(신성)한 希望(희망)과 義務(의무)를 感覺(감각)한다.

윌슨 씨를 조문함
민족자결주의의 아버지

1.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자, 제1차 세계대전의 중재자, 국제연맹의 창안자인 윌손 씨는 마침내 서거했다. 비록 그의 시대가 이미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1918, 1919 두 해에 그가 민족자결과 비배상·비병합주의를 제시하고 유럽에서 ‘정의와 인도’를 위해 사자후 하던 당시를 떠올릴 때에 누구나 ‘아, 인류의 한 위인이 갔도다’라는 탄식을 참지 못할 것이다.

2.
실제 정치의 수완, 그 중에서도 외교의 수완에 관해 혹은 그를 이상가, 공상가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그를 한 사람의 현실 정치가로써 평하고 싶지 않고 일대 인류의 이상을 대표하는 이상가로 그를 높이 우러르고 싶다. 비록 그가 강화의 기초조건으로 제창하고 그만 제창했을 뿐만 아니라 관계 열국이 뜨겁게 승인까지 했던 유명한 14개조, 그 중에도 민족자결주의와 비배상·비병합주의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이른바 강대국의 전통적인 제국주의적 ‘탐욕’ 때문에 여지없이 파괴됐고 그의 마지막 노력인 국제연맹조차도 헤이그회의의 뒤를 이어 갈수록 하나의 역사적 유물에 불과한 참상을 당하게 됐다고 하더라고 그 때문에 그의 이상이 공상이 돼버렸다고 웃어버릴 수는 없다. 모든 위대한 이상이 그렇듯이 그의 이상도 인류에게 영원히 끄지 못할 화염을 던지고야 말았다.

3.
그 화염이란 무엇인가. 곧 민족은 대소에 관계없이 각각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진리다. 비록 순전히 이 주의가 실현된 것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 주의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핀란드 유대 등 다수의 약소민족이 오랫동안 잃었던 자유를 회복했고 기타 약소민족들도 이 기세에 올라타 민족자결의 정신과 운동이 왕성하게 됐다. 민족자결, 이에 따라서 나오는 민족자립은 이제 시간문제요 이론문제가 아닌 것은 인류의 정론이며 이것을 이렇게 만든 공적은 윌슨 씨에게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특히 우리 조선인은 그에게 대해 남달리 사랑과 존경의 감정을 갖는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특별한 원조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가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우리 민족의 가슴에 공명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그를 애도하는 정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정의의 친구’ ‘약자의 친구’를 잃어버린 슬픔을 우리는 아낌없이 드러낼 것이다.

5.
우리는 새해에 2대 위인을 잃었으니 곧 레닌과 윌슨이다. 이 인류의 두 위인은 또한 인류의 양대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이니 우리가 지금 애도하는 윌슨 씨는 민주주의의 최고 이상가이며 동시에 완성자라고 할 것이고 얼마 전에 이미 애도한 레닌 씨는 사회주의 실현의 제일인이다. 두 사람 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두 사람의 이상은(아마 하나로 융합해) 뒤에 남은 인류의 손으로 조만간 세상에 실현되고야 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는 위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시에 일종의 신정한 희망과 의무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