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1월 9일

쇠퇴 비참…일본인이 독점한 경성 산업계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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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한 해도 저물어가는 11월 6일자 동아일보 2면에 ‘여지없는 조선인 공업’이란 제목의 머리기사가 실렸습니다. 조선인 공업이 어쩔 도리가 없다는 이 제목의 뜻은 이어지는 소제목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무엇에나 구축당하는 조선인, 점점 쇠퇴하여 가는 우리 사업.’ 이 기사는 당시 한반도의 최대도시인 경성의 산업계 현주소를 점검하는 총 6회 연재의 첫 회분이었습니다. 지금의 서울시인 그때 경성부의 통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으로 경성 산업계의 실태를 알렸죠.

경성의 산업계를 크게 △기계‧기구 △포백 △화학 △식량 △기타의 5개 분야로 구분하고 다시 소분야로 나누었습니다. 여기서 포백은 베와 비단의 뜻으로 섬유업에 해당됩니다. 소분야별로 20만여 명의 경성부민들이 몇 명이나 일하고 자본금과 연간 생산액은 얼마인지 수치로 나타냈습니다. 경성부민과 상대가 되는 사람들은? 네, 일본인들입니다. 그러니까 각 분야에서 경성부민과 일본인의 공장 수와 자본금, 연간 생산액을 비교했죠.



기계‧기구의 소분야 중 하나인 차량‧선박을 볼까요? 공장 수는 일본인 7곳, 경성부민 3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본금은 일본인 255만6200원, 경성부민 5000원이고 연간 생산액은 일본인 331만1378원, 경성부민 3만8000원이었죠. 점유율로 하면 일본인이 자본금과 연간 생산액의 거의 10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경성부민 소유 공장에서 1년에 인력거 20대와 화차 200여대를 만들었지만 경성에서 연간 제조되는 차량 총대수의 11%에 불과했죠.



금속제품 공장 수는 일본인 66곳, 경성부민 35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금과 연간 생산에서 경성부민은 16%와 13%를 차지하는데 그쳤죠. 경성부민의 공장이 영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품목으로 봐도 일본인이 전동기, 판금세공, 각종 기계 등을 제조한 반면 경성부민은 놋그릇, 농기구, 자전거 따위를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경성부민의 공장은 전기 동력이 아니라 대부분 수공업 방식이었죠.



경성부민이 강세를 보일만한 소비산업인 과자에서도 일본인이 연간 생산액의 90%를 차지했고 청량음료는 공장 3곳을 모두 일본인이 소유했습니다. 이런데도 경성부민들은 ‘목마르다고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달다고 과자를 사먹을 줄 아니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기자는 한탄하죠. 술도 소주나 약주는 제쳐두고 정종이나 위스키를 찾으니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경성부민이 그나마 연간 생산액에서 우위를 보이는 소분야는 직물과 견(繭‧누에고치)제품, 정곡업, 피혁, 고무, 동식물성 기름, 모자뿐이었죠. 하지만 피혁과 고무는 일본인이 게다를 많이 신느라 구두나 고무신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동포를 빈곤의 늪에 빠지게 하는 차별적인 산업구조를 개선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미 조선총독부가 1921년 열었던 산업조사위원회의 결론이 ‘조선을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와 상품 소비시장, 일본 자본의 진출지로 개발한다’였으니까요(2020년 8월 1일자 ‘“일본과 경제 전쟁서 지면 민족참화”···이기려면’ 참조). 동아일보가 같은 해 10월 7일자 사설에서 ‘어떻게 공업을 발전하게 하며 어떻게 그것을 장려할 도리가 있느냐’라고 답답해 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1923년 기대 속에 깃발을 올렸던 물산장려운동은 반짝 효과에 그쳤죠.

동아일보는 이 해 12월 29일자 사설 ‘이 현상을 어떻게 구제할까’에서 일본과 조선 사이에 관세를 부활하고 일본인 이민정책을 중단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두 가지만 이행돼도 한결 숨통이 트일 테니까요. 그리고 일제 지배 아래서 대규모 기계공업을 일으킬 방법은 없지만 소규모 공업이라도 촉진하라고 총독부에 요구합니다. 동포들에게는 근면, 절약, 상호부조를 호소했고요. 슬프지만 아마도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기사입력일 : 2021년 05월 04일
全部(전부)가 日人(일인) 獨占(독점)
무엇이든지 맨드든 것은 일본인
턱업시 사용만 하랴는 조션사람
日人(일인)과 比較(비교)한 京城(경성)의 工業(공업)(四‧4)


이 우에 긔록한 바와 가치 수레박휘 하나도 일본사람 쇠쪼각 하나도 일본사람 모든 공업품이라 할 것은 전부가 일본사람의 것이어니와 그보다 좀 성질이 다른 식료품공댱은 엇더할가. 식료품이니 녜로부터 먹어오든 것이라 조선인의 사업이 여긔는 좀 발뎐하리라 생각하겟지마는 그도 수자를 대조하여 보니 정미업에 균형을 겨우 어덧슬 뿐이오 그 나머지는 역시 아레에 긔록한 바와 가치 비참한 현상이다.

◇精穀業(정곡업)
정곡업이라 하면 정미와 정맥의 두 가지로는 할 수 잇는데 이 둘을 합하야 공장 총수가 륙십이개소 자본금이 백오만륙천팔백팔십칠원 년산액이 사백륙십사만삼천오백륙십오원 중 조선인 경영과 일본인 경영을 분간하여 보면
=朝鮮人(조선인)=
▲工塲(공장) 數(수) 四十八(48) ▲資本金(자본금) 二十七萬九千四百五○圓(27만9450원) ▲年産額(연산액) 二百四十八萬三千三百六十一圓(248만3361원)
=日本人(일본인)=
▲工塲(공장) 數(수) 十四(14) ▲資本金(자본금) 七十七萬七千四百三十七圓(77만7437원) ▲年産額(연산액) 二百十萬六千二百四圓(210만6204원)

정미정맥업에는 년산액이 조선인측이 별루 손색이 업는 듯하나 공장 수와 비레하여 보면 역시 그 모양이며 제분업(製粉業)에는 일본사람의 독무대라고 할 수 잇스니 제분공장 구개소의 자본금 백일만구천일백원 년산액 백오십륙만팔천륙백사십구원 중 조선인 경영은 공장은 네 곳이나 잇스나 자본금이 사만이천원에 년산액이 겨우 이만삼천오백원에 불과하야 그 성적이 나날이 퇴축하는 것이 고성락일의 눗김이 업지 안타.

◇菓子(과자) 淸凉飮料(청량음료)

경성부에서만 맨드는 과자가 일년에 백십일만팔천륙백삼십이원이며 청량음료수가 일년에 오만칠천사백삼십이원이며 청량음료수가 일년에 오만칠천사백삼십팔원인데 청량음료수는 전부 일본인이 경영하는 세 공장에서 제조하는 것이오 과자는 그 공장이 륙십개소에 자본금이 칠십륙만일천사백오십구원 년산액이 백십일만팔천륙백삼십이원 중 조선인 경영이라고는 단 아홉에 자본금이 일만삼천일백원 년산액이 십일만일천원이라는데 일본인의 십분지일에 불과한 상태이다. 그러면서도 조선사람은 목마르다고 음료수를 뻘꺽뻘꺽 마시고 달다고 과자를 사먹을 줄 아니 장차 엇지하잔 말인가.

◇酒類(주류) 及(급) 酢(초)
녯날에는 소주나 약주 가튼 것으로 만족하든 조선사람이 이것도 개명의 덕분인지 소주 약주는 다 집어버리고 항용 『정종』이나 『휘스키』를 찻게 되엿다. 이것도 개명의 묘건이라면 모르겟스되 구축밧는 조선주와 이것을 양조하는 조선인공장의 비참한 꼴을 보라.

=朝鮮人(조선인)=
▲工塲(공장) 數(수) 十五(15) ▲資本金(자본금) 四萬五千五百圓(4만5500원) ▲年産額(산액) 十五萬二千六十八圓(15만2068원)
=朝鮮人(조선인)=
▲工塲(공장) 數(수) 十七(17) ▲資本金(자본금) 四十七萬九千五百圓(47만9500원) ▲年産額(원년산액) 三十八萬五千七百六圓(38만5706원)
일본사람 공장은 대개가 청주요 조선인 제조는 약주 탁주 소주인데 이 운명도 멀지안아 청주에 합병이 되고 말 것이다.

◇製麵製鹽(제면제염)

국수를 긔계로 만드는 공장 수는 오개소 자본금이 일만팔천삼백원 년산액이 오만이천칠백사십원이 잇지마는 전부 일본인 경영이오 제염업도 공장이 삼개소에 자본금이 삼만이천오백원 년산액이 사만삼천팔백구십원이 잇지마는 전부 일본인의 독점사업이다.(계속)

모두 일본인 독점
무엇이든지 만드는 것은 일본인
턱없이 사용만 하려는 조선인
일본인과 비교한 경성의 공업(4)

이전 회에 기록한 바와 같이 수레바퀴 하나도 일본사람, 쇳조각 하나도 일본사람, 모든 공업품이라고 할 것은 모두가 일본인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좀 성격이 다른 식료품공장은 어떠할까. 식료품이니 예로부터 먹어오든 것이라 조선인의 사업이 이 부문에서는 좀 발전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이것도 숫자를 대조하여 보니 정미업에서 균형을 겨우 맞췄을 뿐이지 그 나머지는 역시 아래에 기록한 것과 같이 비참한 지경이다.

◇정곡업

정곡업이라고 하면 정미와 정맥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나 이 둘을 합하여 공장 총수가 62곳, 자본금이 105만7887원, 연 생산액이 464만3565원이다. 이를 조선인 경영과 일본인 경영으로 나눠서 보면
=조선인=
▲공장 수 48 ▲자본금 27만9450원 ▲연 생산액 248만3361원
=일본인=
▲공장 수 14 ▲자본금 77만7437원 ▲연 생산액 210만6204원

정미‧정맥업에는 연 생산액에서 조선인 측이 별로 손색이 없는 듯하지만 공장 수와 비례하여 보면 역시 그 수준이며 제분업에서는 일본인의 독무대라고 할 수 있다. 제분공장 9곳의 자본금 101만9100원, 연 생산액 156만8649원 중 조선인 경영 공장은 4곳이나 있으나 자본금이 4만2000원에 연 생산액이 겨우 2만3500원에 불과하여 그 성적이 나날이 쪼그라드는 것이 해 떨어지는 외진 성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과자‧청량음료
경성부에서만 만드는 과자가 1년에 111만8632원 어치이며 청량음료수가 1년에 5만7432원이다. 청량음료수는 전부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장 3곳에서 제조하는 것이고 과자는 공장 60곳에 자본금이 76만1459원, 연 생산액이 111만8632원 가운데 조선인 경영이라고는 단 9곳에 자본금이 1만3100원, 연 생산액이 11만1000원으로 일본인의 10%에 불과한 상태이다. 그러면서도 조선사람은 목마르다고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달다고 과자를 사먹을 줄 아니 장차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주류 및 조미식초

옛날에는 소주나 약주 같은 것으로 만족하던 조선사람이 문명개화의 덕분인지 소주 약주는 다 치워버리고 늘 ‘정종’이나 ‘위스키’를 찾게 되었다. 이것도 개명의 요건이라면 모르겠으나 쫓겨나는 조선 술과 이를 만드는 조선인 공장의 비참한 꼴을 보라.

=조선인=
▲공장 수 15 ▲자본금 4만5500원 ▲연 생산액 15만2068원
=일본인=
▲공장 수 17 ▲자본금 47만9500원 ▲연 생산액 38만5706원
일본인 공장은 대개 청주를 만들고 조선인은 약주 탁주 소주를 제조하지만 이들의 운명도 멀지 않아 청주에 합병이 되고 말 것이다.
 
◇제면‧제염
국수를 기계로 만드는 공장 수는 5곳, 자본금이 1만8300원, 연 생산액이 5만2740원이 있지만 모두 일본인 경영이다. 제염업도 공장이 3곳에 자본금 3만2500원, 연 생산액 4만3890원이지만 전부 일본인의 독점 사업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