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최대 지주의 상투어 ‘괜히 떠들지 말라’
동척이 설립됐을 때 대한제국이 30%를 출자했습니다. 현금이 아닌 현물, 바로 땅으로 납부했죠. 땅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자 한 곳으로 모았죠. 이 곳이 황해도 재령평야였습니다. 나무리벌이라고 불렸던 기름진 옥토였죠. 동척은 빌려서 마련한 나머지 70%의 자본금으로 다른 논을 더 샀습니다. 일제는 일본 농민을 데려와 이런 논을 넘겨줄 계획이었죠. 초기 구상으로는 무려 1000만 명을 들여오려고 했답니다. 대륙 침탈의 토대로 삼을 심산이었죠.
하지만 우리 농민의 반발이 거셌고 일본 농민도 그리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농민 24만 명을 들여오려던 목표가 무산됐으니까요. 1928년 현재 약 4000가구만 이민 왔을 뿐입니다. 일본의 앞선 농사기술을 전수해 생산량을 늘린다는 계획도 틀어졌죠. 이제 동척 자체가 지주 노릇을 하게 됐습니다. 수많은 우리 농민을 소작인으로 부리며 소작료를 받아갔죠. 동척은 자본금으로 빌린 돈의 부담이 컸습니다. 소작인들에게는 거대 악질 지주가 생긴 것이죠.
그동안 곳곳에서 동척 소작인들의 원성이 들려왔지만 1924년 재령평야에서 큰일이 터졌습니다. 이 해는 가뭄과 홍수 벌레 바람이 겨끔내기로 몰아닥쳐 흉작 중의 흉작이 됐죠. 그러나 10월에 동척은 3석6두를 거둬들인 한 소작인에게 소작료 6석을 내라고 했습니다. 평년 수준 소작료였죠. 기가 막힌 소작인들은 동척 주재소로 몰려가 소작료를 깎아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재령군 북률면과 봉산군 사인면 소작인들의 처지가 특히 딱했죠. 하지만 주재소 앞마당에서 5일간 농성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소작인들은 동척 지점으로 몰려갔습니다. 지점장에게 애원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지점장은 출장 가 자리에 없다고 했습니다. 500명 가까운 소작인들은 만나줄 때까지 떠나지 않겠다고 했죠. 북쪽의 겨울은 빨리 찾아옵니다. 이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농성에 들어갔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대표를 뽑아 동척 경성지점과 총독부, 황해도청 등으로 보내 진정서를 전달하며 하소연하기도 했죠.
경성까지 올라가 만난 동척 총재는 ‘여기서도 생각이 있으니 돌아가서 조용히 있으라’라고 말했습니다. 동척 경성지점장은 ‘아무쪼록 원만히 해결할 터이니 조용히 기다려 주기를 바란다’라고 했죠. 총독부 사회과장은 ‘공연히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훈계했고요. 농성과 호소, 애원, 진정도 효력이 없자 농민들은 소작조합을 결성하고 소작권 박탈 무효 등을 결의하며 맞서기도 했습니다.
경성지점을 통해 해결될 듯하던 사태는 해를 넘겨 동척의 소작료 강제집행으로 치달았습니다. 사인면 50가구의 옷 가마 이불 식기 등을 빼앗았죠. 1월말 혹한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울부짖는 소작인들에게 ‘너희들 죄 때문이다’라고 내뱉었죠. 북률면에서는 엽총으로 무장한 일본인 40여명과 몽둥이를 쥔 어용단체 향상회원 15명이 강제집행을 거들었죠. 소작인들이 막아서자 일본인들은 갑자기 총을 쏘았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죠. 경찰은 총질을 눈감아 줍니다. 부상자가 없다면서요. 일본인을 때렸다는 혐의로 소작조합 대표들이 연행된 사이에 강제 집행은 속행됐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농민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기사입력일 : 2021년 05월 28일
東拓(동척) 一派(일파)의
放銃騷動顚末(방총소동전말)
北栗面(북률면) 小作爭議(소작쟁의) 詳報(상보)
沙里院支局(사리원지국) 特派記者(특파기자)
황해도 재녕군(載寧郡) 북률면(北栗面) 소작인 수백명은 작년 십월부터 동양척식회사(東拓會社)를 상대로 하야 불공평한 소작료 문뎨로 얼마 전까지 싸호든 바 소작인 대표자 리몽서(李蒙瑞)씨는 지난 일월 이십삼일에 동양척식회사(東拓會社) 경성지뎜(京城支店) 리사 지촌(芝村)씨와 회견한 결과 원만한 해결을 엇은 후 깃분 마음으로 도라왓다 함은 당시 보도한 바와 갓거니와
전긔 소작인 대표 리몽서 씨는 다시 북률면 동척회사주재소 주임 죽내(竹內) 씨를 차자보고 경성지뎜에서 원만한 해결을 엇은 것을 말한즉 전긔 죽내 씨도 동정을 표하며 리몽서 씨를 대하야 그와가치 해결은 어덧스나 소작료 문뎨에 대하야서는 밧을 만한 소작인에게는 아니 밧을 수가 업다 한즉 소작인 대표 측에서도 조사를 확실히 하야 밧을 만한 소작인에게서는 밧도록 힘을 쓰겟다고 말한 후 즉시 조사에 착수하엿든 것인데
지난 오일부터 소작인 수백명과 그 회사와 큰 싸홈이 이러나게 된 원인은 그날 그 회사에서는 돌연히 집달리를 다리고 소작인들 집으로 달려드러가 가장집물을 집행한 까닭인데 그날은 마츰 북률면 내종리(內宗里) 장날임으로 근처 소작인들도 수백 명이 장을 보러왓다가 차봉필(車鳳弼)을 몬저 집행하는 것을 보고 모다 놀내여 남의 일 당하는 것이 졔 일가틈으로 수백 명의 소작인들은 마음이 쓰라려 아모 일 볼 생각도 못하고 장하리(長河里) 안제식(安濟植) 집으로 건너가다가 집행을 하고 나오는 집달리 일행들과 격분된 수백 명의 소작인들과 충돌이 생긴 것이다.
毆打(구타) 傷害(상해) 暴行(폭행)
이 가튼 죄목으로
다셧 명을 인치
별항 보도와 가치 그날 장하리 안제식 집을 집행하고 나오든 때 수백 명의 소작인들이 그곳으로 모혀든즉 그 회사원인 유정삼지조(油井三之助) 한채선(韓采善) 외에 일본이민 몃 명이 겁이 나서 도망을 하기 시작하야 수백 명의 소작인들도 흥분이 되야 아우성을 치며 일대풍파가 이러나는 동시에 유정이라는 사원은 매를 맛고 즉시 고소를 한 바 소작인 대표자 김계윤(金桂潤) 최소환(崔昭煥) 신광록(申光錄)과 소작인 송재현(宋載鉉) 신내섭(申乃變) 두 명을 합하야 다섯 명은 구타 상해 폭행 가옥파괴란 죄명으로 그곳 경찰관주재소에서 대강 심문을 밧다가 지난 륙일 오후 여섯시 경에 재녕경찰서로 보내엿다.
卒倒(졸도) 失眞(실진)의 殺風景(살풍경)
한 동안은 전연히 전쟁상태로
◇日移民(일이민) 放銃(방총) 當時(당시)의 現塲(현장)
별항 보도한 바와 가치 동양척식회사와 소작인 사이에 이러나는 싸홈은 지난 오일부터 지작되야 북률면 일대는 큰 전쟁을 치르고 난 것가치 인심이 흉흉하며 소작인들은 급급히 단결이 되야 그 이튼날 새벽부터 여덜시까지 모혀드는 소작인은 삼사백 명에 달하고 그 회사에서는 특별히 반동단톄인 소위 향상회(向上會)원으로 몽치를 가진 자 십오 명과 일본이민 사십여 명이 혹은 몽치 혹은 총을 가지고 그 회사원들과 다시 장하리 최소환(崔昭煥) 안인락(安仁洛) 두 집을 집행할 때에 모혀잇든 삼사백 명의 소작인들은 전과 가치 뒤를 따라가서 항의를 하든 결과 형편이 틀린 줄 알고 모조리 도망을 하며 일본 이민들이 실탄을 박은 총을 련속하야 노왓다. 이와가치 련발하는 총소리는 북률면 일대를 소동식혀 큰 전쟁을 격는 것 갓핫스며 수백 명의 소작인들은 모다 정신을 일코 혹은 도망하고 혹은 졸도하야 당장에 사상자가 생긴 것으로 알고 일반은 더욱 망지소조하야 문밧글 잘 나서지 못하엿스며 사람 죽엇다는 말까지 생겨 한참동안은 물끌틋 하엿다는데 다행히 부상자는 업섯스며 경관의 명령으로 집행을 중지식히는 동시 소작인들도 해산되엿스며 그날 밤은 비밀히 향상회에서 모엿스나 사실 내용을 알 수 업스며 드른즉 그 회사에서는 만일을 념려하야 경을 한다고 한다.
向上會(향상회)의 奸計(간계)?
집행을 시작하여도
향상회의 계교라고
북률면 소작쟁의는 너무도 험악하야 폭동이 되든 그 현장의 사실은 일일히 알 수도 업거니와 탐문한즉 그날 총소래가 다섯 번이나 난 뒤로는 사방에 난여 잇든 삼백여 호의 일본 이민이 각각 총을 메이고 내종리를 중심 삼아 수백 명이 모엿든 것을 경관이 해산을 식혓섯다는데 당초부터 동척회사 소작인의 집을 집행하는 곳에 사십 명식이나 되는 이민이 따라다니다가 실탈 박은 총을 놋는 것도 가통하거니와 그 내막을 드려다볼사록 망측하고 긔괴할 뿐더러 그만하면 동척의 심사도 짐작할 것이다. 그러고 소위 향상회라는 몸둥이를 해부하야 보면 온갖 잡놈들이 모혀드러 향상이란 의미도 해석치 못하고 위선 주린 목구멍을 축이랴고 별별 짓을 하야 가며 동척사원과 꽁문이를 맛대고 큰 권세나 엇은 듯이 소작인을 위협도 하며 이번 집행을 하게 된 원인도 그자들의 충동이 만타 하며 그중에는 예수교 장로 노릇하든 양학쟁이도 끼여 잇다고 한다.
『解决(해결)은 全然(전연) 無根(무근)』
지난번 경셩지뎜과의 해결은
전연 무근이라고 죽내 씨 괴변
이 사건에 대하야 그곳 동척주재소 주임 죽내 씨를 방문한즉 이 압흐로는 아모조록 소작인들이 소동치 안토록 최선의 방침을 강구한다 하며 경성지뎜에 리사로 잇는 지촌 씨가 해결을 지엿다는 것은 전연히 무근한 말이요 그 사실을 보도한 신문들은 오전한 것이라라는데 맛츰 그 당시 경성지뎜에서 소작인들을 위하야 통역을 한 고세형(高世衡) 씨를 다시 방문하고 드른즉 분개하야 그럴 리가 업다 하며 지촌 씨로 말하면 전선지뎜을 관리하는 바 그 회사에서 작뎡된 것이 북률면 소작인들의 요구조건과 갓흔고로 해결된 것이나 다름업다고 소작인들에게 당당히 언명한 것이라 하며 그자들의 간교한 말을 듯고는 더욱 놀나며 분히 녁인다더라.
『放銃件(방총건)은 問題(문제) 안 돼 공탄으로 하늘 향한 것이요』
◇責任(책임)한 黑田警部補(흑전경부보) 談(담)
다시 그곳 경찰관 주재소의 말을 드른즉 출장한 흑뎐(黑田)경부보는 이번 사건은 그다지 큰 소요는 아니라 하며 이민이 실탄을 박아 발포한데 대하야는 실탄이 아니고 공탄이라는 뻔뻔한 수작을 하며 공중을 향하야 발사할 뿐 아니라 너무 위급하여 그러케 한 것이닛가 문뎨도 아니된다 하더라.(사리원지국 특파긔자)
동척 일파의
총탄 발사 소동 전말
북률면 소작쟁의 상보
사리원지국 특파기자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소작인 수백 명은 작년 10월부터 동양척식회사를 상대로 하여 불공평한 소작료 문제로 얼마 전까지 싸웠으나 소작인 대표자 이몽서 씨는 지난 1월 23일에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 이사 시바무라 씨와 만난 결과 원만한 해결책을 얻은 뒤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당시 보도한 것과 같다. 위의 소작인 대표 이몽서 씨는 다시 북률면 동척회사 주재소 주임 다케우치 씨를 찾아가 경성지점에서 원만한 해결책을 얻었다고 말하자 다케우치 씨도 같은 뜻을 보이며 이몽서 씨에게 그같이 해결책은 얻었지만 소작료 문제에 대해서는 받을만한 소작인에게는 안 받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소작인 대표 측에서도 조사를 확실히 해 받을 만한 소작인에게는 받도록 힘을 쓰겠다고 말한 뒤 즉시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지난 5일부터 소작인 수백 명과 그 회사와 큰 싸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그날 그 회사에서 갑자기 집달리를 데리고 소작인들 집으로 달려 들어가 가정 집기를 강제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마침 북률면 내종리 장날이어서 근처 소작인들도 수백 명이 장을 보러 왔다가 차봉필을 먼저 집행하는 것을 보고 모두 놀라 남의 일 당하는 것이 자기 일 같았다. 소작인들은 마음이 쓰라려 아무 일 볼 생각도 못하고 장하리 안제식 집으로 건너가다가 집행을 하고 나오는 집달리 일행과 격분한 수백 명의 소작인들과 충돌이 생긴 것이다.
구타 상해 폭행
이러한 죄목으로
5명을 연행
위 기사와 같이 그날 장하리 안제식 집을 집행하고 나오던 때 수백 명의 소작인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자 동척 회사원인 유이 산노스케 한채선 외에 일본 이민 몇 명이 겁이 나서 도망가기 시작해 수백 명의 소작인들도 흥분해 아우성을 치며 일대풍파가 일어났다. 유이라는 사원은 매를 맞고 즉시 고소해 소작인 대표자 김계윤 최소환 신광록과 소작인 송재현 신내섭 2명을 포함한 5명은 구타 상해 폭행 가옥파괴 혐의로 그곳 경찰관주재소에서 대강 심문을 받다가 지난 6일 오후 6시경에 재령경찰서로 넘겨졌다.
졸도 실신의 살풍경
한동안은 완전히 전쟁상태로
◇일본 이민 엽총 발사 당시의 현장
위 보도와 같이 동양척식회사와 소작인 사이의 싸움은 지난 5일부터 시작돼 북률면 일대는 큰 전쟁을 치르고 난 것처럼 인심이 흉흉하며 소작인들은 급속히 단결하여 그 이튿날 새벽부터 8시까지 모여든 소작인이 300, 400명에 이르렀다. 동척에서는 특별히 어용단체인 이른바 향상회 회원으로 몽둥이를 든 15명과 일본 이민 40여명이 몽둥이 또는 총을 들고 동척 회사원들과 다시 장하리 최소환 안인락 두 집을 강제 집행했다. 이 때 모여든 300, 400명의 소작인들은 전처럼 뒤를 따라가서 항의를 한 결과 형편이 틀린 줄 알고 모두 도망가며 일본 이민들이 실탄을 넣은 총을 연속으로 쏘았다. 이처럼 연발하는 총소리는 북률면 일대를 흥분시켜 큰 전쟁을 겪는 것 같았으며 수백 명의 소작인들은 모두 정신을 잃고 혹은 도망가고 혹은 졸도해 당장 사상자가 생긴 것으로 알고 일반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라 문밖을 잘 나서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죽었다는 말까지 생겨 한참 동안은 물 끓듯 하였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으며 경찰의 명령으로 강제 집행을 중지시키는 동시에 소작인들도 해산되었으며 그날 밤은 비밀리에 향상회에서 모였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며 듣기로는 동척에서는 만일을 염려하여 경계를 한다고 한다.
향상회의 간사한 계획?
집행을 시작해도
향상회의 계략이라고
북률면 소작쟁의는 너무도 험악해 폭동이 된 그 현장의 사실은 일일이 할 수도 없지만 탐문해보니 그날 총소리가 다섯 차례나 난 뒤로는 사방에 나뉘어 있던 300여 호의 일본 이민이 각각 총을 메고 내종리를 중심으로 수백 명이 모여든 것을 경찰이 해산시켰다고 한다. 당초부터 동척회사 소작인의 집을 강제 집행하는 곳에 40명씩이나 되는 이민이 따라다니다가 실탄 넣은 총을 쏜 것도 통탄스럽고 그 내막을 들여다볼수록 망측하고 기괴할뿐더러 그만하면 동척의 심사도 짐작할 것이다. 그리고 소위 향상회라는 몸체를 해부해 보면 온갖 잡놈들이 모여들어 향상이란 뜻도 해석하지 못하고 우선 주린 목구멍을 축이려고 별별 짓을 해가며 동척 사원과 꽁무니를 맞대고 큰 권세나 얻은 듯이 소작인을 위협한다. 이번 강제 집행을 하게 된 원인도 그자들의 충동이 컸다 하며 그중에는 예수교 장로 노릇하던 기독교도도 끼어 있다고 한다.
“해결은 전혀 무근”
지난번 경성지점과의 해결은
전혀 무근이라고 다케우치 씨 괴변
이 사건에 대하여 그곳 동척주재소 주임 다케우치 씨를 방문하니 이 앞으로는 아무쪼록 소작인들이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최선의 방침을 강구한다고 하며 경성지점에 이사로 있는 시바무라 씨가 해결을 지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무근의 말이고 그 사실을 보도한 신문들은 오보를 낸 것이라고 하였다. 마침 그 당시 경성지점에서 소작인들을 위해 통역을 한 고세형 씨를 다시 찾아가 들으니 분개해 그럴 리가 없다 하며 시바무라 씨로 말하면 전 조선지점을 관리하므로 동척에서 결정된 것이 북률면 소작인들의 요구조건과 같으니까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소작인들에게 당당하게 밝힌 것이라고 하면서 그자들의 간교한 말을 듣고는 더욱 놀라며 분하게 여긴다고 했다.
“발사 건은 문제 안 돼 공포탄으로 하늘을 향한 것이오”
◇담당 구로타 경부보 발언
다시 그곳 경찰관 주재소의 말을 들어보니 출장 갔던 구로타 경부보는 이번 사건은 그렇게 큰 소요는 아니라면서 일본 이민이 실탄을 발사한 것에 대해서는 실탄이 아니고 공포탄이라는 뻔뻔한 수작을 하였다. 공중을 향해 발사했을 뿐 아니라 너무 위급해 그렇게 한 것이니까 문제도 안 된다고 하였다.(사리원지국 특파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