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07월 01일

부자 귀족 이완용 “돈 없어 교육세 내지 않겠다” 버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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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8월 말 경성부민에게 학교비 납부고지서가 도착했습니다. 경성부는 지금의 서울시이고 학교비는 교육세로 보면 됩니다. 그때는 경성부민을 형편에 따라 1~50등급으로 나누고 살림살이가 여유 있을수록 누진율을 적용해 등급별 학교비를 정했죠. 이완용은 민영휘와 함께 5등급이 적용돼 학교비 3885원40전을 내라고 했습니다. 3885원은 현재 3500만 원쯤 됩니다. 당시 1~4등급은 해당자가 없었고 5등급이 최고 부자였던 셈이죠.


일제는 일본에서는 의무교육을 실시해 공립학교 운영비의 절반 정도를 국비로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수익자 부담원칙’을 거론하며 학교비를 내라고 했습니다. 학교비를 가구마다 등급별로 나눴기 때문에 ‘학교비 호별할’이라고 불렀죠. 일제는 이 돈 말고도 주민세 격인 호세와 주택세인 가옥세, 토지세인 지세에 각기 일정률을 적용한 부과금을 걷어 학교비로 썼습니다. 이 부과금과 호별할로도 모자라자 지방자치단체별로 기부금을 또 걷었죠.


과거 신문에 실린 이완용의 얼굴사진. ①은 매일신보 1912년 8월 18일자 ②는 매일신보 1925년 8월 7일자 ③은 그가 숨진 소식을 전한 매일신보 1926년 2월 13일자 ④는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완용은 ‘경성 Top 2’의 부자로 공인받았지만 제1기분 고지서를 받은 바로 다음날 돌려보냈습니다. 이듬해인 1925년 3월에 경성부가 보낸 제2기분 고지서 역시 반환했죠. 금액이 너무 많다는 불만 표시가 분명했습니다. 당황한 쪽은 경성부였죠. 상대가 대한제국 총리대신을 지냈고 한일병합의 1등 공신인데다 조선 귀족 중 제일 높은 후작에, 중추원 부의장인 이완용이었으니까요. 이완용의 아들인 남작 이항구도 아버지처럼 고지서를 물렸습니다.


이완용의 학교비 할인 파동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 제목. ①이완용이 고지서를 되돌려 보내고 ②경성부가 차압에 들어간다고 맞서며 ③경성부가 학교비를 깎아줬고 ④이에 학교 평의원회가 시민대회를 연다거나 ⑤총사퇴로 반발하고 ⑥경성부민들도 빈부차별이 웬 말이며 ⑦부민들의 납부 거부를 불러올 위험이 있고 ⑧결국 학교비 납부 실적이 저조한 결과를 낳았다.
경성부는 당황했지만 꿀리지는 않았습니다. 재산 조사를 잘못했나 싶어 재조사까지 해보았으나 제대로 부과했다고 자신했거든요. 그래서 기한 내에 내지 않으면 재산을 차압하면 된다고 실무자들은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 경성부윤 다니 다키마는 “(이완용이) 재산을 어디다 갖다 뒀는지 잘 조사할 수가 없다. 생활정도와 의식범절이 생각보다 검소하다”며 어떻게든 받아내겠다고 하면서도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경성부가 이완용의 학교비를 할인해준 작태를 비판한 1925년 7월 2일자 동아일보 사설. 이완용의 재산 조사를 잘못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권력이나 정실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큰 악정은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납부기한인 6월 말이 지나자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경성부가 이완용을 5등급에서 10등급으로 낮춰줬죠. 금액은 3885원40전에서 1631원20전으로 줄었고요. 이완용은 감액 통보를 받은 즉시 납부했습니다. 경성부윤 다니는 이렇게 처리한 뒤 평북지사로 갔습니다. 후임자한테 부담을 안 주겠다는 갸륵한(?) 마음이었겠죠. 하나 궁금한 건 사립학교를 세워 2세 교육에 앞장선 부자들도 더러 있었는데 이완용은 왜 그렇게 인색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자기 손자들은 일찌감치 일본 유학을 보내놓고선···.


경성부의 할인 조치는 일파만파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학교비 결정에 자문하는 학교 평의원회는 ‘우릴 뭘로 보고 맘대로 깎아줬느냐’며 펄펄 뛰었죠. 항의 시민대회를 열겠다고 했고 총사퇴 카드까지 꺼내들었습니다. 학교비 4원 중 2원을 마저 내지 못한 한 부인은 경성부가 집에 있는 풍금에 차압 딱지를 붙이자 “부자는 깎아주고 가난뱅이는 차압을 하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이완용도 경성부민이고 나도 경성부민이다”라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이완용은 1896년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으로, 2년 뒤에는 회장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①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는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고 보도했다. ②이완용이 숨을 거둔 경성 옥인동 저택. 대지만 약 9917제곱미터(3000평)이었다.
‘이완용 할인 조치’로 적지 않은 경성부민들도 덩달아 학교비를 안 내려고 하는 바람에 두고두고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경성부 조사가 5등급과 10등급을 구별할 수 없었다면 경성 30만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해 하루라도 그런 무책임한 자의 존재를 참을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고 권력이나 정실에 의해 이렇게 되었다면 이 이상 가는 악정(惡政)이 어디 있는가’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완용이 숨을 거둔 이틀 뒤인 1926년 2월 13일자에 동아일보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사설을 실었다. '이 벌을 인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로 끝나는 이 사설은 총독부에 의해 삭제당했다.
학교비 할인 파동 이듬해 이완용은 69세로 집에서 숨졌습니다. 일본 천황이 최고 훈장을 수여했고 장례 행렬만 4㎞ 넘게 이어졌죠. 천하의 명당이라는 곳에 묻혔고요. 살아선 지독하게 돈을 모았고 죽어선 명당을 차지했지만 평안했을까요? 매국노 손가락질과 봉분 훼손으로 훗날 증손자가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화장했습니다.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죠. 이완용의 땅을 찾겠다는 뒤늦은 시도는 특별법으로 무산됐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입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06월 25일


無責任(무책임)한 京城府(경성부)

五等級(5등급)을 减額(감액)

충분히 조사 후 작뎡하고도

세력에 눌려서 잘못햇다고

李侯(이후)의 學校費(학교비) 事件(사건)



리완용(李完用)후작이 대정 십삼년도 학교비 오등급 삼천팔백팔십오원사십전을 아니내엿다 함과 경성부에서는 그 세력에 눌리워 얼마간 감하여 주어 밧도록 할 모양이라 함은 일즉 보도한 바어니와 본보의 예보가 뎍중되야 그 학교비의 사뎡액 조사가 잘못되엿다는 구실로 부과액을 감하여 수일 전에 납부케 하엿는데 그 감한 액이 실로 경성부 학교비 제도가 실시된 이후로는 처음이라 할만한 반액 이상이 되여 방금 학교비 평의원 중에는 큰 문뎨가 되어 잇는데 그 뎐말을 듯건대 리완용 후는 본래 륙등 삼천이백륙십륙원사십전을 무러 오든 바 이것은 넘어 헐하다 하야 경성부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 년 수입 이십사만이천원 이상의 수입이 잇스리라는 표준으로 대정 십삼년도부터 한등을 올려 오등으로 하야 삼천팔백팔십오원사십전을 매이고 뎨일긔분 납세고지서를 작년 팔월 말일부로 리완용 후에게 송부하엿던 바 라완용 후작은 그 이튼날 즉시 그것을 못내겟다고 그 고지서를 경성부에 돌려보내엿고 금년 삼월에 발부한 뎨이긔분도 역시 거절을 하야 지금까지 아니 내임으로 경성부에서는 망지소조하야 재산조사를 빙자하고 내면으로 부윤이 직접 탄원을 하느니 사이에 리왕직 차관이 나서서 알선을 하느니 하엿섯스나 결국은 리완용 후 측이 승리하야 전 경성부윤 곡(谷)씨가 바로 뎐근하기 전날에 지금까지의 경성부에서 조사한 사뎡은 모도가 그릇된 것임을 재조사에 의하야 인뎡하엿슴으로 다시 조사한 바에 의하야 오등 삼천팔백팔십오원사십전을 오등급이나 낫추어 십등급 일천륙백삼십일원이십전으로 즉시 그날 납부케 한 것이라더라.


『當世貴顯 (당세귀현)이라 밋기는 밋슴니다만은 조사도 함니다』

◇高橋(고교) 財務課長(재무과장) 談(담)



일을 이러케 젓글고 간 곡(谷)씨는 임의 평북디사로 뎐금하여 가서 그 책임자는 업스나 직접 관여자인 고교(高橋)재무과댱은 아래와 가치 말하더라. 이번 일은 곡 전 부윤이 책임을 후임자에게 기칠 수 업다는 뜻으로 가기 전에 이러케 처치를 하고 간 것인데 리 후작은 녯날 대관이오 지금의 귀현(貴顯)이라 결코 자긔 재산을 속여 세금을 적게 내는 다시 말하면 탈세자의 행위는 안 할신 분이라는 밋음 아래서 리 후작의 주장대로 감액을 한 것이오 그러나 지금도 다시 조사는 함니다만은 검사모양으로 강제 수색을 할 수도 업는 형편인즉 문뎨는 문뎨이외다. 래달에 열리는 학교비평의원회 석상에서는 또 문뎨가 되겟지오.


斷不默過(단부묵과)

학교비평회

문뎨를 이르키겟소


◇評議員(평의원) 某氏(모씨) 談(담)

이에 대하야 학교비 평의회원 모씨는 말하되

처음 륙등을 매일 때도 경성부에서 충분한 조사를 한 후에 한 일이고 작년도부터 오등으로 올릴 때도 더 충분한 조사 끄테 결뎡된 일이라 함은 경성부 당국은 물론 일반부민도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잇는 일인데 이번에 오등급이나 깍거 십등으로 낫추엇다는 것은 아모리 선의로 생각하여 보아도 해석할 수가 업는 일이외다. 임의 경성부에서 그러케 처치하엿다니 지금에 엇절 수는 업스나 부민을 위하야 그대로 묵과치는 못할 일이오』 하더라.


무책임한 경성부

5등급을 감액

충분히 조사 후 결정하고도

힘에 눌려서 잘못했다고

이완용 후작의 학교비 사건



이완용 후작이 1924년 학교비 5등급 3885원 40전을 내지 않았다는 점과 경성부에서는 그 힘에 눌려 어느 정도 깎아줘 받도록 할 모양이라는 점은 일찍이 보도한 바와 같다. 본보의 예상이 적중하여 그 학교비 사정액 조사가 잘못되었다는 구실로 부과액을 깎아 며칠 전에 납부하게 하였는데 그 깎아준 금액이 실로 경성부 학교비 제도가 시행된 이후로 처음이락 할만한 절반 이상이 되어 현재 학교비 평의원 중에서는 큰 문제가 되었다.


그 전말을 들어보니 이완용 후작은 본래 6등급 3266원 40전을 내왔으나 이는 너무 적다고 해서 경성부가 다시 조사하였다. 그 결과 연간 24만2000원 이상의 수입이 있으리라는 표준으로 1924년도부터 1개 등급을 올려 5등급으로 해서 3885원 40전을 부과하고 제1기분 납세고지서를 작년 8월 말일부토 이완용 후작에게 송부하였다. 이완용 후작은 그 이튿날 즉시 이를 내지 못하겠다고 고지서를 경성부로 돌려보냈다.


올해 3월 발부한 제2기분도 역시 거부하여 지금까지 내지 않으므로 경성부에서는 당황하여 재산조사를 핑계로 물밑에서 부윤이 직접 탄원을 하느니 중간에 이왕직 차관이 나서서 알선을 하느니 하였다. 결국은 이완용 후작이 승리하여 전 경성부윤 다니 다키마 씨가 전근하기 바로 전날에 지금까지 경성부에서 조사한 결과는 모두 틀렸다는 점을 재조사를 함으로써 인정하였다. 다시 조사한 결과 5등급 3885원 40전을 5개 등급이나 낮춰 10등급 1631원 20전으로 통보하여 즉시 그날 납부하게 했다고 한다.



“존귀하고 이름이 높아 믿기는 믿습니다만 조사도 합니다”

◇다카하시 재무과장 발언



일을 이렇게 저지르고 간 다니 씨는 이미 평북지사로 전근해 가서 그 책임자는 없지만 직접 관련자인 다카하시 재무과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 일은 다니 전 부윤이 책임을 후임자에게 떠넘길 수 없다는 뜻으로 전근가지 전에 이렇게 처리를 하고 간 것이오. 이 후작은 예전 대관이오 지금 귀하고 높아 결코 자기 재산을 속여 세금을 적게 내는, 다시 말하면 탈세자의 행위는 안 하실 분이라는 믿음 아래서 이 후작의 주장대로 감액을 한 것이오. 그러나 지금도 다시 조사는 합니다만 검사처럼 강제 수색을 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문제는 문제이외다. 다음달에 열리는 학교비 평의원회 석상에서 또 문제가 되겠지요.”


절대로 묵과하지 않겠다

학교비 평의회

문제를 일으키겠소

◇평의원 모씨 발언



이에 대하여 학교비 평의회원 모씨는 말하되

“처음 6등급으로 부과할 때도 경성부에서 충분한 조사를 한 뒤 한 일이고 작년도부터 5등급으로 올릴 때도 더 충분한 조사 끝에 결정된 일이라는 점은 경성부 당국은 물론 일반부민도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오. 그런데 이번에 5개 등급이나 깎아 10등급으로 낮추었다는 점은 아무리 선의로 생각하여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외다. 이미 경성부에서 그렇게 처리하였다니 지금 어쩔 수는 없지만 부민을 위해서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 없는 일이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