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3월 9일

여성 취업 선배의 조언 “무엇보다 자영자활 독립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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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개성 옷감 ‘송고직’과 양말을 들고 팔러 다닐 때는 막막했습니다. 여학교와 병원 가정집 문을 두드리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고 입도 벙긋하지 못했죠. 남자들은 응원했지만 친구나 살림하는 부인들은 오히려 뒤돌아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럴수록 ‘부끄러움을 없애자, 뜻한 일을 반드시 이루자’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한 처녀 포목상이 1925년 되돌아본 과거입니다. 당초 그는 장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경성 이화학교 고등과 3학년을 마친 뒤 고향인 개성 호수돈여학교로 전학해 학업을 마친 나름 신여성이었죠. 졸업하던 해 3‧1운동이 일어나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그해 가을 교편을 잡은 여학교에서 천황 생일행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학생들을 선동했다며 면직처분을 받아 인생행로가 멈칫했습니다.


동아일보는 1925년 1월부터 ‘부인면‘을 제작하면서 첫 연재기사로 ‘새학기도 두 달밖에‘를 실어 경성부의 여학교를 차례로 소개했다. ①정신여학교 ②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③배화여학교 ④이화여학교 ⑤진명여학교 ⑥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그는 교육자가 되기 위해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지만 돈이 모자라 학비가 싸다는 중국 쑤저우 징하이여자사범학교로 옮겼습니다. 본과 2학년을 마치고 난징여자대학에 입학하려다 이왕 공부할 작정이라면 미국으로 가겠다며 잠깐 경성에 돌아왔으나 문제는 돈이었죠. 더구나 선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여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전환점이 됐습니다. 살림만 하는 주부들을 집밖으로 이끌어 경제활동을 하도록 돕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독립적으로 자영자활하는 여성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소매를 걷어붙여야 했습니다. 포목상 하는 남성의 지원으로 가게 한 쪽을 얻어 조선 상품만 팔며 ‘정직한 이윤’을 얻는 사업가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습니다.


①동덕여학교 교사 김종춘의 수업 모습(아래)과 그의 가족(위) ②중앙유치원 교사 차사백이 어린이들에게 율동을 가르치는 모습(아래)과 그의 가족(위) ③조선은행 은행원으로 업무를 보는 윤정식(아래)과 그의 남편(위)



동아일보 1925년 3월 9일자 6면에 나온 여성 사업가 이경지의 사연입니다. ‘구직하는 이를 위하여’ 문패로 7회 연재한 기사는 여학교 교사, 유치원 교사, 은행원, 포목상, 여기자, 공무원, 간호사로 일하는 여성들을 차례로 소개했습니다. 고등보통학교 이상을 나온 여성들이 진출한 직종에서 이미 자리 잡은 선배들의 생활을 전해 취업정보를 주는 기사였죠. 각 회마다 앞부분에는 경성의 주요 여학교 졸업생들의 진로도 알려주었습니다. 동덕여학교, 중앙유치사범과,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배화여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정신여학교, 이화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순이었습니다.


왼쪽은 교육자의 꿈을 접고 상업계에서 성공하겠다고 발벗고 나선 포목상 이경지. 오른쪽은 한국인 여기자 2호인 최은희가 기사를 쓰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는 이 해 1월부터 5월까지 ‘부인면’ 즉 ‘여성면’을 제작했습니다. 4월 말 실었던 ‘조선의 현상과 부인 직업문제’ 2회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당시 여성계의 가장 큰 현안이 교육과 직업이었던 점을 감안한 지면이었죠. ‘부인면’ 초기 연재했던 시리즈가 경성부내 여학교 소개였던 점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육 문호는 여성에게도 점차 열리고 있었지만 직업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죠. 여교사가 드물었고 여성 은행원·사무원만 봐도 희한하다고 여겼으니까요. 1930년 국세조사에서 교사 간호사 같은 공무‧자유업에 속한 경성의 조선여성 비율은 1.63%였습니다. 100명 중 2명도 안 됐죠. 경성의 취업여성 비율이 13.9%에 그쳤습니다. 여의사는 가물에 콩 나듯 있었지만 여변호사는 법으로 금지된 시대였죠.


왼쪽은 지금의 서울시에 해당하는 경성부 재무과에서 일하는 서정희. 오른쪽은 태화진찰소에서 약을 따르고 있는 간호사 한신광



따라서 교사나 은행원 사무원 등은 1920년대 중반 일제강점기 때 여성들이 진출할 수 있는 최고 직업이었습니다. 스스로 벌어 입에 풀칠해야 하는 여성들은 어찌어찌 하다 공장에 갔습니다. 담배공장 고무공장 정미공장 제사공장 등이었죠. 1925년 1월 1일자 ‘신산한 생활과 비통한 경력담’에서 소개된 여공들은 힘겨운 장시간 노동으로 몸이 점차 망가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부장 문화의 집에 돌아가도 일이 쌓여 있었던데다 부모나 자식을 제대로 돌볼 겨를도 없었죠. 아홉 살짜리 아이까지 데려와 일을 시키는 형편이었습니다. 처녀 여공들은 몸이 고달픈 한편으로 길가는 여학생만 보면 치솟는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죠. 증조, 고조할머니들의 땀과 눈물, 의지를 딛고 우리가 여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07월 16일
졸업도 한 달밧게 【四‧4】
구직하는 이를 위하야
작 금년 졸업생
═培花女學校(배화여학교)═


인왕산 밋헤서 정깁흔 학창의 생활은 리별에 애끗는 정서와 함께 사랑하는 모교 배화를 등지고 나오는 이들! 열성 잇는 선생님의 교훈! 완전한 인격을 양성하여라 사회뎍 생활에 결함 업는 참인간이 되어라 하는 귀박휘에서 쟁쟁하든 그 교훈을 실행하려 넓고널은 무한애(無限涯)의 사회를 향하야 동경의 쭉지를 널게 펴고 산보다 큰 리상의 뭉치를 안고 나아올 배화의 작 금년 졸업생의 통계를 보건데 작년 졸업생은

일본 류학            삼 인
리화학당             십 인
일본녀학교         일 인
교원             구 인
가사             오 인

합계가 이십팔 인인데 금년 졸업생은

일본녀학교         오 인
리화학당             삼 인
일본광도 일인도립사범     일 인
교원             삼 인
가사             사 인

으로 도합 십칠 인입니다. 그런데 금년 졸업생을 작년도나 전년에 비교하여 보면 가사에 나아오는 이의 수효가 적어지고 상급학교로 가는 이의 수효가 만어짐니다. 이제 상급학교로 향하지 안코 일시 가뎡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들의 가삼 속에는 장래의 무엇을 속살거리며 향하여 나아가려는지?

商業家(상업가)의 生活(생활)
李瓊芝(이경지) 孃(양)


◇······긔자는 부인으로 실업계의 헌신하야 상업에 종사하는 선진인 리경지(李瓊芝)양을 차저갓슴니다. 양은 개성군(開城郡) 풍덕(豊德) 출생으로 일즉이 조선의 녀자교육이 보급되지 못한 초보 시긔이엿슬 때에 싀골에 숫새악씨로 공부의 뜻을 두고 서울로 올나와서 어린 맘에 부모형뎨의 그리움도 저바리고 리화학교에 입학하야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맛치고 고등과 삼학년까지 수업한 후 자긔의 어린 동생의 공부를 위하여 개성으로 나려가서 호수돈녀학교에 전학하야 한편으로 어린 동생의 공부하는 뒤를 거두며 졸업의 면류관을 쓰게 된 때는 일천구백십구년 삼일운동이 이려나든 해 봄이엿섯슴니다. 그러나 양은 완전한 졸업식도 업시 끌는 피와 타오르는 정렬을 토하여가며 삼일운동에 참가하여 밧부게 단니다가 또거운 녀름에 잠간 고향 풍덕으로 가서 쉴 때에 졸업장은 이전자리 우표의 매달녀서 양의 손에 드러오게 되엿슴니다. 그밧는 순간에 사 오년 형설의 공이 성대한 식도 업시 그텃케 무미하게 자긔의 손으로 드러온 것이 한업는 알지 못할 설음을 늣기게 하엿슴니다.

물 우에 뜬 풀 갓치
일본으로 중국으로


서늘한 가을이 되어 다시 개성으로 올라온 양은 미리흠(美理欽)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엿스나 불과 일삭에 십월 천장절 날에 학생을 선동하야 식장에 참가치 안케 하엿다는 죄명 아래에서 오 년 간의 면직을 밧게 되엿슴니다. 그 후 양은 교육에 목뎍을 두고 외국으로 향하려 하엿스나 뜻잇는 사람의 손 가운데는 의례히 돈이 업는 것이라서 애만 쓰다가 그곳 몃몃 유지의 도음으로 그 이듬해 정월 엇던 추운 새벽 컴컴한 려명에 쓴 눈물을 개성역에 뿌린 후 그는 일본 동경으로 향하엿슴니다. 다시 그 곳에서도 학자 곤란으로 경비 적게 든다는 중국을 향하야 그 녀름에 떠낫슴니다. 그리하야 소주(蘇州) 경해(景海)녀학교의 예과 일년을 맛친 후 본과 이학년까지 맛치고 남경녀자대학의 입학할 준비를 하다가 그 땅에서 여러 해를 썩이는 이보다 저 미주로 건너가는 것이 훨신 나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준비 차로 고국을 향하야 발을 옴겻슴니다.

무엇보다 실업
여자들을 실업으로 인도


◇······그리운 한양성의 발길을 드러놋튼 그때의 그의 머리 가운데 번개 갓치 번적거린 불곳은 『돈이 업시는 못하겟다』는 압흐고도 쏘린 늣김이엿슴니다. 그 후 려행권 교섭은 이 삼년 전에 묵은 선동자라는 죄명 아레 긔각되고 마럿슴니다. 이때 그의 가삼에 타오르는 비분의 불길은 엇더한 적은 위안으로는 끌 수가 업슬 때 그의 맘 가온데는 방향전환긔(方向轉換期)가 닥처왓슴니다. 이미 자긔가 더 공부하야 신진 녀자의 교육가가 되겟다든 리상은 멀니 날녀보내고 불상한 구가뎡 부인들을 인도하는 사람이 되겟다. 인도하되 실업 방면으로 지도하여 독립뎍으로 자영자활하는 녀성을 만들겟다는 위대한 포부와 리상을 가지고 비로소 실업방면으로 발길을 드려놋케 되엿슴니다.

재봉소를 설시
자본 안 드는 부인 재봉을


◇······실업 방면으로 상업계의 나선 그의게는 일푼의 자본이 업섯슴니다. 양은 얼마간의 자본을 엇어가지고 부인 재봉소 경영하는 방변으로 위선 자본을 모으는 상업에 착수하기로 하엿슴니다. 그리하야 송고직(松高織)과 양말을 가지고 경성으로 오게 된 때는 작년 일은 가을 구월달이엿슴니다. 위선 그의게는 조그마한 구멍가개 집 하나 업고 뜻을 갓치 할 동지가 업섯슴니다. 양은 위선 한 곳에 류숙하면서 각 녀학교 병원으로 가뎡으로 물건을 가지고 팔러단니게 되엿슴니다. 첫 번 가던 때는 여자의 맘으로 참아 붓그러워 말도 잘 안나왓지만은 한 번 가고 두 번 갈 때는 점점 리력이 나서 붓그러움도 덜러지고 오직 마음에(붓그럼도 업새자 나의 뜻 한 바를 성공하여야겟다』는 굿은 걸심에 용긔를 더하게 되엿슴니다. 간 곳마다 남자들은 찬성하는 일이 만코 동정하는 이도 만엇지만은 그의 동무나 구 가뎡 부인들은 여자가 상업을 한다고 돌녀 세노코 비소하는 이조차 업지 안어 각금각금 무진 상처를 밧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엿슴니다.

겨우 상뎜을 열어
차차 자리가 잡히여


◇······하로 종일 단녀도 얼마밧게 안이 팔니고 엿던 날은 단 몃 십 전을 파는 때도 잇섯슴니다. 그래도 양은 남모르는 눈물을 먹음어 가면서 한편으로는 매일 가치 단니며 한편으로는 상업에 동지를 구하엿슴니다. 그러나 동지는 업섯슴니다. 그리다가 지금부터 한보롬 전에 시내에 포목상 하는 리세헌(李世賢) 씨가 그의 고상한 리상과 탄복할 만한 사업을 듯고 자긔 상뎜의 한편을 빌니고 동업하기를 청하엿슴니다. 이리하여 양은 이제까지의 구하든 바 동성의 동지는 못 구하고 이성의 동지를 엇게 되여 그곳에다가 작으마 하고 간단하게 상뎜을 펴노코 자리를 정하고 장사를 하게 되엿슴니다. 그리하야 이제는 적으나마 아조 자리를 정하고 완전한 상업에 착수하게 되엿슴니다. 양은 이제 상뎜을 버려노코 상뎜에서 남는 시간은 각 가뎡을 방문한다고 함니다.

조선물산만 팔어
불의 리익을 탐치 안어


◇······양은 상뎜을 하되 조선사람의 만든 물품으로써 실용뎍 물건만 모아 노코 팔며 언제나 조선사람의 가뎡을 본위로 하고 상품을 구하여 노흐며 각금각금 요구에 응하여 개성서 송고직 등을 무역하여 온다고 함니다. 왕방한 긔자를 『무엇보다도 여자도 실업에 종사하여야 함니다. 긔왕보다는 녀학생들 중에 실업방면에 뜻을 두는 이가 좀 잇는 듯하나 일반적으로는 아직도 상업에 대한 리해력이나 지망자가 그리는 것갓지 안슴니다. 압흐로는 녀자도 경제뎍으로 독립하여야 할 줄 암니다. 또 일반뎍으로 상업하는 자는 무리의 리를 탐하는 줄 아는 이도 잇지만은 나는 꼭꼭 뎡한 나의 로력이 드는 것만치의 리를 먹기 때문에 조금도 양심에 가책이 업고 오히려 스사로 생각할 때 극히 성결한 늣김을 가지게 됨니다. 또 일반이 차차 리해하는 듯한 긔분을 볼 때는 더욱 힘이 생김니다』 하더니다. 양은 현재 그의 부모님과 형뎨는 다 개성의 잇스시며 자긔 혼자 객지에 와서 자취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중임니다.(끗)(자질하는 리경지 양)


졸업도 한 달밖에 (4)
구직하는 이를 위하여
작년 올해 졸업생
═배화여학교═

인왕산 밑에서 정 깊은 학창생활은 이별에 애끊는 정서와 함께 사랑하는 모교 배화를 등지고 나오는 이들! 열성 있는 선생님의 교훈! 완전한 인격을 양성하여라, 사회적 생활에 결함 없는 참인간이 되어라, 하는 귓바퀴에서 쟁쟁하던 그 교훈을 실현하려 넓고 넓은 무한애의 사회를 향하여 동경의 날개를 넓게 펴고 산보다 큰 이상의 뭉치를 안고 나아올 배화의 작년 올해 졸업생 통계를 살펴봅니다. 작년 졸업생은

일본 유학    3명
이화학당        10명
일본여학교    1명
교사        9명
가사        5명

합계가 28명인데 올해 졸업생은

일본여학교    5명
이화학당        3명
일본 히로시마
일인도립사범    1명
교사        3명
가사        4명

으로 모두 16명입니다. 그런데 올해 졸업생을 지난해나 그 전해와 비교해 보면 가사를 하는 수는 적어지고 상급학교로 가는 학생이 많아집니다. 이제 상급학교로 향하지 않고 잠깐 가정으로 가는 이들의 가슴 속에는 장래의 무엇을 속삭이며 갈 것인지?

상업가의 생활
이경지 양


◇···기자는 부인으로 실업계에 헌신하여 상업에 종사하는 앞선 사람 이경지 양을 찾아갔습니다. 이 양은 개성군 풍덕 출생으로 일찍이 조선에 여자교육이 보급되지 못하던 초기였을 때 시골에 숫처녀로 공부에 뜻을 두고 서울로 올라와서 어린 마음에 부모 형제의 그리움도 저버리고 이화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고등과 3학년까지 수업하였습니다. 그 후 자기 어린 동생의 공부를 위하여 개성으로 내려가서 호수돈여학교에 전학하여 한편으로 어린 동생의 공부하는 뒤를 보살피며 졸업의 면류관을 쓰게 된 때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양은 완전한 졸업식도 없이 끓는 피와 타오르는 정열을 토해 가며 3‧1운동에 참가하여 바쁘게 다니다가 뜨거운 여름에 잠깐 고향 풍덕으로 가서 쉴 때 졸업장은 2전짜리 우표에 매달려서 이 양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받는 순간에 4, 5년 형설의 공이 성대한 식도 없이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자기의 손으로 들어온 것이 한없는 알지 못할 설움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물 위에 뜬 풀 같이
일본으로, 중국으로


서늘한 가을이 되어 다시 개성으로 올라온 이 양은 미리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으나 불과 한 달 만인 10월 천장절에 학생을 선동하여 식장에 참가하지 않게 하였다는 죄명 아래에서 5년 간의 면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양은 교육에 목적을 두고 외국으로 가려 하였으나 뜻 있는 사람의 손 안에는 으레 돈이 없어서 애만 쓰다가 그 곳 몇몇 유지의 도움으로 그 이듬해 1월 어떤 추운 새벽 컴컴한 여명에 쓰라린 눈물을 개성역에 뿌린 뒤 일본 도쿄로 향하였습니다. 다시 그 곳에서도 학비 곤란으로 경비가 적게 든다는 중국을 향하여 그해 여름에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쑤저우 징하이여자사범학교의 예과 1년을 마친 뒤 본과 2학년까지 마치고 난징여자대학에 입학할 준비를 하다가 그 땅에서 여러 해를 썩이느니보다 저 미주로 건너가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준비 차로 고국을 향하여 발을 옮겼습니다.

무엇보다 실업
여자들을 실업으로 인도


◇···그리운 한양성에 발길을 들여놓던 그때의 그의 머리 가운데 번개 같이 번쩍거린 불꽃은 “돈이 없어서는 못하겠다”는 아프고도 쓰린 느낌이었습니다. 그 후 여권 교섭은 2, 3년 전에 전력 있는 선동자라는 죄명 아래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그의 가슴에 타오르는 비분의 불길은 어떠한 적은 위안으로는 끌 수가 없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방향전환시기가 닥쳐왔습니다. 이미 자기가 더 공부해서 선진 여자의 교육가가 되겠다는 이상은 멀리 날려 보내고 불쌍한 옛 가정 부인들을 인도하는 사람이 되겠다, 인도하되 실업 방면으로 지도하여 독립적으로 자영자활하는 여성을 만들겠다는 위대한 포부와 이상을 가지고 비로소 실업방면으로 발길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재봉소를 설치
자본 안 드는 부인 재봉을


◇···실업 방면으로 상업계에 나선 그에게는 한 푼의 자본이 없었습니다. 이 양은 얼마간의 자본을 얻어가지고 부인 재봉소를 경영하는 방편으로 우선 자본을 모으는 상업에 착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개성 옷감 송고직과 양말을 가지고 경성으로 온 때는 지난해 이른 가을 9월이었습니다. 우선 그에게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나 집 한 채 없고 뜻을 같이 할 동지가 없었습니다. 이 양은 우선 한 곳에 묵으면서 각 여학교와 병원으로, 가정으로 물건을 가지고 팔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 가던 때는 여자의 마음으로 차마 부끄러워 말도 잘 안 나왔지만 한 번 가고 두 번 갈 때는 점점 이력이 나서 부끄러움도 덜어지고 오직 마음에 ‘부끄러움도 없애자, 나의 뜻한 바를 성공하여야겠다’는 굳은 결심에 용기를 더하게 되었습니다. 간 곳마다 남자들은 찬성하는 일이 많고 동정하는 이도 많았지만 그의 친구나 옛 가정 부인들은 여자가 장사를 한다고 돌려세워놓고 비웃는 이조차 없지 않아 가끔가끔 매우 상처를 받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겨우 상점을 열어
차차 자리가 잡혀


◇···하루 종일 다녀도 얼마밖에 팔리지 않고 어떤 날은 단 몇 십 전어치를 파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양은 남모르는 눈물을 머금어 가면서 한편으로는 매일 같이 다니며 한편으로는 장사할 동지를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부터 한 보름 전에 시내에 포목상 하는 이세현 씨가 이 양의 고상한 이상과 탄복할 만한 사업구상을 듣고 자기 상점의 한켠을 빌려주고 동업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 양은 이제까지 구하던 동성의 동지는 못 구하고 이성의 동지를 얻게 되어 그곳에다 자그마하고 간단하게 상점을 펼쳐놓고 자리를 정하고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적으나마 아주 자리를 정하고 완전한 상업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이 양은 이제 상점을 벌여놓고 상점에서 남는 시간을 각 가정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조선물산만 팔아
옳지 않은 이익은 바라지 않아


◇···이 양은 상점을 하되 조선사람이 만든 상품으로 실용적인 물건만 모아 놓고 팔며 언제나 조선사람의 가정을 기준으로 하여 상품을 구해 놓으며 가끔가끔 요청에 따라 개성에서 송고직 등을 떼어온다고 합니다. 찾아간 기자에게 “무엇보다 여자도 실업에 종사하여야 합니다. 기왕보다는 여학생들 중에 실업방면에 뜻을 두는 이가 좀 있는 듯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아직도 상업에 대한 이해력이나 지망자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여자도 경제적으로 독립하여야 할 줄 압니다. 또 일반적으로 장사하는 사람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익을 탐내는 줄 아는 이도 있지만 나는 반드시 깨끗한 나의 노력이 드는 것만큼의 이익을 얻기 때문에 조금도 양심에 가책이 없고 오히려 스스로 생각할 때 매우 정결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도 일반이 차차 이해하는 듯한 분위기를 볼 때는 더욱 힘이 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양은 현재 그의 부모님과 형제는 모두 개성에 있으며 자기 혼자 객지에 와서 자취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중입니다.(끝) (사진은 옷감의 치수를 재는 이경지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