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일본 밑에 영원히 묶어두려던 조선사편수회
그러나 조선반도사는 흐지부지됐습니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 때문이었죠. 일제는 역사 조작을 통해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키기에는 한민족의 뿌리가 튼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조상이 같다거나 일본이 조선의 문명개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 쉽사리 통하지 않았죠. 총독부는 방향을 틀었습니다. 역사 서술에서 사료(史料) 수집으로요. 1923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출범시켰고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로 조직을 확대했습니다. 회장은 내내 정무총감이 맡았죠. 이 해 10월 조선사편수회 제1회 회의를 열어 8년을 시한으로 ‘조선사’를 발간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습니다. 동아일보 10월 13일자 1면의 ‘朝鮮史는 七時代로 區分’은 이 첫 회의를 소개한 기사입니다.
일제가 ‘조선사’를 통사가 아니라 자료집 형태로 내겠다고 한 배경에는 능력 부족도 작용했습니다. 조선의 반만년 통사를 쓸 만한 일본 전문가가 영 부족했거든요. 당시엔 기껏해야 고대사나 일본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조선 연구가 나오는데 불과했습니다. 조선사편수회를 지휘했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는 고문서학의 권위자였죠. 하지만 자료집 편찬의 바탕에는 한민족의 역사를 일본 밑에 영원히 묶어두려는 무서운 장치도 깔려 있었습니다. 마치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통해 중앙권력이 지방영주를 복속시켜 나갔듯이 우리 역사도 일본제국의 하위부문으로 끼워 맞추는 틀을 만들려 했던 것이죠. 일본은 중앙, 조선은 지방이라는 구도를 고정하기 위해 활용할 사료를 모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숙신(肅愼)은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발해 같은 것도 조선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이십니까?’ 육당 최남선이 조선사편수회 제4회 회의에서 꺼낸 질문입니다. 최남선의 조선사편수회 활동은 친일 행적의 하나로 꼽힙니다. 하지만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의 시작을 삼국시대 이후로 잡으려는 시도에 이의를 제기했죠. 말하자면 안에서 싸운 셈입니다. 단군 연구의 대가인 최남선이었으니까 가능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사편수회는 연 월 일이 분명한 사실만 싣는다는 실증주의를 앞세워 고조선을 제외시켰습니다.
1933년까지 ‘조선사’를 내겠다는 계획은 5년이 더 지난 1938년에야 35책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지방은 물론 일본 만주까지 가서 고문서 문집 영정 고지도 탁본 등을 사들였죠. 고문서만 6만1500장에 가까운 분량이 수집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펴낸 ‘조선사’는 해방 이후에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 연구자들은 ‘조선사’를 밑그림으로 해서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다고 하니까요.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했던 일본 연구자들은 한국 국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의 후속기관쯤으로 볼 정도였습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연구도 ‘조선사’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번 잘못 꿰어진 단추를 바로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입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07월 16일
七時代(7시대)로 區分(구분)
完成(완성)은 卄二年(20년) 後(후)
總督府(총독부) 朝鮮史編修會(조선사편수회)의 第一回(제1회) 會合(회합)은 去(거) 八日(8일) 開催(개최)되엿는데 編修會(편수회)의 目的(목적)은 朝鮮(조선) 古代(고대)부터 現在(현재)까지의 史料(사료)를 蒐集(수집)하야 完全(완전)한 朝鮮史(조선사)를 編纂(편찬)하랴는 大規模(대규모)의 事業(사업)인 바 그 具體的(구체적) 計劃案(계획안)으로는 朝鮮史(조선사)의 體裁(체재)、文體(문체) 史料蒐集(사료수집)의 範圍(범위)、稿本(고본) 作成(작성) 等(등)으로 分(분)하고 編年史(편년사)로는 左(좌)와 如(여)히 區分(구분)하야 編纂(편찬)하리라더라.
一(1)、三國以前(삼국이전)
二(2)、三國時代(삼국시대)
三(3)、新羅時代(신라시대)
四(4)、高麗時代(고려시대)
五(5)、朝鮮時代(조선시대) 前期(전기)
六(6)、同(동) 中期(중기)(光海君·광해군 ─ 英祖·영조까지)
七(7)、同(동) 後期(후기)(正祖·정조 ─ 甲午改革·갑오개혁까지)
體裁(체재)는 爲先(위선) 綱文(강문)을 揭(게)하고 次(차)에 史料(사료)를 收錄(수록)하기토 하엿슴으로 一般(일반)은 그 綱文(강문)만 보면 史實(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 한다. 第一回(제1회)의 委員會(위원회)는 來(내) 二十二年(22년)까지 完成(완성)할 計劃(계획)을 决定(결정)하엿다는데 卽(즉) 來(내) 十五年度(15년도)부터 十六年(16년)까지 二個年間(2개년간)에 史料(사료)의 蒐集(수집)을 完了(완료)하고 十七年(17년) 以後(이후) 二十年(20년)까지 四個年(4개년)에 稿本(고본)을 作成(작성)하야 二十二年(22년)까지 修正(수정)을 終了(종료) 上梓(상재)하기로 하엿다. 그런데 史料(사료)의 蒐集(수집)에 對(대)하야는 各道(각도)는 勿論(물론) 日本(일본) 中國(중국) 各(각) 方面(방면)에 亘(긍)하야 關係(관계) 記錄(기록)을 探索(탐색)하야 謄本(등본)을 作(작)하기로 하엿다는 바 膽本(등본) 作成(작성)만 하여모 人員(인원)이 二十萬人(20만인)은 要(요)하리라고한다. 二十二年(22년) 後(후)의 此(차) 朝鮮史(조선사)는 極(극)히 浩翰(호한)한 것일 것으로 그 冊數(책수)는 幾百冊(기백책)이 될는지 아즉 不明(불명)하다더라.
7개 시대로 구분
완성은 20년 후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제1회 회합은 지난 8일 개최되었다. 편수회의 목적은 조선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사료를 수집하여 완전한 조선사를 편찬하려는 대규모의 사업이다. 그 구체적 계획안으로는 조선사의 체재, 문체, 사료 수집의 범위, 원고 작성 등으로 나누고 편년체 역사로는 아래와 같이 구분하여 편찬한다고 한다.
1. 삼국 이전
2. 삼국시대
3. 신라시대
4. 고려시대
5. 조선시대 전기
6. 조선시대 중기(광해군~영조까지)
7. 조선시대 후기(정조~갑오개혁까지)
체재는 우선 요약문을 게시하고 다음에 사료를 수록하기로 하였으므로 일반인은 그 요약문만 보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제1회 위원회는 오는 1933년까지 완성할 계획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즉 오는 1926년부터 1927년까지 2개년 간 사료의 수집을 완료하고 1928년 이후 1931년까지 4개년에 원고를 작성하여 1933년까지 수정을 마쳐 출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료의 수집에 대해서 각 도는 물론 일본 중국 각 방면에 퍼져 있는 관계 기록을 탐색하여 필사본을 만들기로 하였다. 필사본 작성만 해도 인원이 20만 명은 필요하리라고 한다. 1933년 이후의 이 조선사는 아주 광대한 분량이 될 것으로 책 수는 몇 백 권이 될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