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민족의 정신’ 외치며 임정 추스른 백암 별세
무엇보다 박은식은 역사가였습니다. ‘국체는 비록 망했으나 국혼이 불멸하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국사책마저 불살라 없어졌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망명하면서 남긴 말입니다. 서간도로 간 뒤 대동고대사론 동명성왕실기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발해태조건국지 등을 불과 7개월 만에 정력적으로 써냈죠. 그의 역사관은 ‘대동사상’이었습니다. 만주도 우리 국토이며 금나라, 청나라도 같은 민족이라고 봤습니다. ‘역사가 없으면 민족도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민족의 정신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죠. 1915년 펴낸 ‘한국통사’는 우리의 눈물, 1920년 써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피였습니다. 두 책은 독립운동의 무기였죠. 이를 겁내서였을까요? 일제는 동아일보 1925년 11월 5일자 추모 사설 ‘哭(곡) 白庵(백암) 朴夫子(박부자)’를 삭제하면서까지 그의 삶이 알려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는 언론인이기도 했습니다. 46세이던 1905년 대한매일신보 주필이 되어 필봉을 휘둘렀습니다. 일제가 대한매일신보를 두려워하여 한성 밖으로는 배포를 막고 박은식을 사령부로 잡아가기까지 했다고 황현의 매천야록은 전합니다. 박은식은 같은 시기 황성신문의 장지연과 함께 ‘쌍두마차’처럼 활약했습니다. 1906년 설립된 대한자강회에서도 매달 발행하는 대한자강회월보의 논설 집필을 요청받았죠.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일제를 강력하게 규탄하고 대한제국의 자강을 외치면서 그의 이름이 높아진 영향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를 떠난 뒤 1908년 입사한 황성신문에서도 박은식의 붓은 멈추지 않았죠. 평안도와 황해도 인사들 중심으로 결성된 서우학회의 임원으로 맡은 직책도 주필이었습니다.
박은식은 뼛속까지 유학자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황해도 2대 신동'으로 꼽혔고 17세에 사서삼경에 통달했습니다. 방에 주자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매일 절을 올릴 정도였죠. 동아일보는 추모 사설에서 그를 ‘朴夫子(박부자)’로 높여 불렀습니다. 중국 밖의 공자라는 뜻이죠. 하지만 주자학에 매몰되진 않았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4월 3, 6일자 기고 ‘학(學)의 진리(眞理)는 의(疑)로 좇아 구(求)하라’처럼 맹목적 추종보다 합리적 의심을 멈추지 않았죠. 바로 과학적 방법론입니다. 1909년 ‘유교구신론’에서 양명학을 받아들여 근대 유학의 길을 열었고 이후 사회주의까지 끌어안았죠. 교육자강을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그가 러시아에서 한족공보 주필로 일하고 노인동맹단에 가세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노인동맹단 대표가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였죠. 하지만 희망에 넘쳐 돌아온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가 분열돼 민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5년째 하와이에서 ‘원격통치’ 중이었죠. 보다 못한 박은식은 ‘이완용보다 보다 더한 역적’이라는 매도를 받아가며 소매를 걷어붙였습니다. 최후수단인 이승만 탄핵과 대통령제 폐지를 박은식은 국무총리로, 2대 임시대통령으로 해냈습니다. 임시정부는 가까스로 국무령체제로 넘어가게 됐죠. 그는 유언으로 “독립운동을 하려면 민족적으로 뭉쳐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꿈이던 ‘한국건국사’ 집필은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09월 10일
一日(1일) 午後(오후) 七時(7시) 上海(상해)에서
우연히 병마의 침로를 입어 용태가 매우 위즁하든 박은식(朴殷植)씨는 드듸어 지난 일일 오후 일곱시경에 륙십칠세를 일긔로 셰사을 떠나고 말앗다더라.【三日(3일) 上海特信(상해특신)】
◇略歷(약력) 先生(선생)은 平北(평북) 寧邊郡(영변군) 胎生(태생)으로 舊韓國時代(구한국시대)에 皇城新聞社(황성신문사)에서 故(고) 柳瑾(유근)氏(씨)와 가치 執筆(집필)한 일이 잇섯다 하며 西北學校長(서북학교장)을 지내고 朝鮮光文會(조선광문회)에서 著書(저서)에 힘쓰다가 辛亥年(신해년) 秋(추)에 西間島(서간도) 桓仁縣(환인현)으로 건너가서 著書(저서)에 專力(전력)하다가 癸丑(계축) 三月頃(3월경)에 北京(북경)으로 갓다 하며 伊後(이후) 中國(중국) 各地(각지)와 俄領(아령) 各地(각지)로 다니다가 上海(상해)로 가서 獨立新聞(독립신문) 社長(사장) 假政府(가정부) 大統領(대통령) 等(등)을 지낫다는데 先生(선생)의 著書(저서)로는 東明干實記(동명왕실기)、明臨答夫傳(명림답부전)、韓國痛史(한국통사)、安重根傳(안중근전) 其他(기타)가 잇다더라.
1일 오후 7시 상하이에서
우연히 병환에 걸려 상태가 매우 위중하던 박은식 씨는 결국 지난 1일 오후 7시 경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3일 상하이 특신】
◇약력
선생은 평안북도 영변군 태생으로 구 한국시대에 황성신문사에서 고 유근 씨와 같이 원고를 집필한 일이 있었다. 서북학교장을 지내고 조선광문회에서 저술에 힘쓰다가 1911년 가을에 서간도 환런현으로 건너가서 저서 작업에 전력하였다. 1913년 3월 경에 베이징으로 갔고 이후 중국 각지와 러시아 각지로 다니다가 상하이로 가서 독립신문 사장,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등을 지냈다. 선생의 저서로는 동명왕실기, 명립답부전, 한국통사, 안중근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