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월 24일

‘싸워라’ 대신 ‘싸우자’ 외친 임정 군무총장 노백린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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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병세는 이상하게 변하야 실진(失眞)이 되는 동시에 상해 엇더한 정신병원에 입원 치료중이라는데···.’ 실진(失眞)은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인용한 구절은 1925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들어 있습니다. 기사의 제목은 ‘精神異狀(정신이상)을 傳(전)하는 上海(상해)의 盧伯麟(노백린) 氏(씨)’였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군무총장을 지낸 계원(桂園) 노백린의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문병 간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고 울다가 웃다가 한다는 겁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타계했습니다. 가슴에 품은 독립전쟁의 원대한 뜻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남의 나라에서 오십 평생을 마감했죠.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의 군복 정장 차림 모습. 촬영 시점은 알 수 없다. 노백린의 묘가 있던 중국 송경령능원 외국인 묘지의 비석 노백린이 처음 안장됐던 중국 상하이 정안사 외국인 묘지 비석. 로파린은 노백린의 중국어 발음이다. 노백린의 유해는 1993년 국내로 봉환됐다.


1875년 황해도 풍천에서 태어난 노백린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했습니다. 부친은 큰 인물이 되라며 이름 진방(鎭邦)을 맏기린의 뜻인 백린(伯麟)으로 고쳤죠.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 나가 4년 만에 사서삼경에 통달해 신동으로 불렸습니다. 20세 때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황해도에서는 그가 유일하게 뽑혔죠. 3년의 준비과정 끝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유학생 생활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쪼들렸습니다. 을미사변으로 친일파가 힘을 잃자 학비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노백린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일본 육사 제11기 졸업생이 됐습니다.

1907년 군대해산 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해주를 지나던 침통한 표정의 노백린. 노백린이 남긴 한문 서찰. 노백린은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 나가기 시작해 4년 만에 사서삼경에 통달했다고 한다. 훗날 남긴 한시나 한문 서찰 등은 어렸을 때 그가 얼마나 한학 공부에 매진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근대 군인으로 거듭난 노백린은 1901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관이 됐습니다. ‘호랑이 교관’으로 유명했다죠. 기숙사 야간순찰 중 ‘노백린을 죽여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방으로 뛰어 들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물었죠. 모두 숨느라 정신이 없는 통에 한 학생이 나서서 허리춤의 칼을 뽑아 찌르는 시늉을 하며 ‘노백린을 이렇게 죽였으면 좋겠다고 했소’라고 대꾸했습니다. 노백린은 껄껄 웃으면서 ‘네가 사나이로구나’라며 숨었던 학생들만 혼냈다고 합니다. 그는 대식가였습니다. 교관 시절 요릿집에 혼자 가서 6, 7인분을 주문했답니다. 종업원은 손님이 다 오면 음식을 들여가려고 했지만 빨리 내오라는 노백린의 꾸중만 들었죠. 혼자서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어치웠던 겁니다.

노백린(가운데)이 192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스에 세운 비행기학교에서 교관들과 함께 비행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미국 하와이에서 중국 상하이로 떠나기 전 함께 만난 임시대통령 이승만(왼쪽)과 군무총장 노백린.

노백린은 1907년 육군무관학교 교장이 됐지만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군대해산의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항의 자결한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 대장 박성환은 훗날 그의 사돈이 됐죠. 그 역시 자결하려 했지만 부하들이 말려 실패했습니다. 시가전을 치르던 젊은 병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오냐, 지금은 할 수 없다. 어디 두고 보자’며 눈물을 삼켰죠. 군을 떠난 그는 고향에 광무학당을 세우기도 하고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에 앞장섰죠. 교장 시절에는 추우나 더우나 도수군사훈련을 실시해 결국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개혁당 신민회 서우학회 등에 가입해 항일민족운동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피혁회사를 설립하고 금광에도 손을 댔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죠.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이 군인 양성과 군대 편성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군인으로 지원하라고 권유하는 군무부 포고 제1호. 전 국무총리 노백린의 장례식이 거행됐다는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6년 2월 8일자 기사.


결국 노백린은 1916년 중국 상하이를 거쳐 하와이로 망명했습니다. 박용만과 의기투합해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호놀룰루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창설했죠.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추대됐지만 바로 합류하지 않고 캘리포니아 윌로스에서 호국독립군단과 비행사 양성을 위한 비행기학교를 세웠습니다. 부자 농장주 김종림의 지원 덕분이었죠. 장차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1921년 상하이 환영식에서 노백린은 군가 가사 중 ‘나가라, 싸우라’를 ‘나가자, 싸우자’로 고쳐 불렀죠. 같이 싸우자는 뜻이었죠. 1922년부터 2년 간 국무총리로 분열 속에 쓰러져 가는 임시정부를 겨우겨우 지탱했습니다. 이때 몸과 마음을 상했는지 그는 끝내 쓰러졌죠. 인력거꾼이 먹는 황포반으로 간신히 끼니를 잇던 생활고도 작용했을 겁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10월 22일
上海(상해)에서 長逝(장서)한
桂園(계원) 盧伯麟(노백린) 氏(씨)
신병으로 실진까지 되엿든
계원 로백린 씨 드듸여 서거
【卄二日(22일) 午前(오전) 十一時(11시) 四十五分(45분)】


긔보═뜻밧게 실진(失眞)이란 병보를 뎐하든 계원(桂園) 로백린(盧伯麟)씨는 수일 젼부터 갑자기 병셰가 위독하여저서 약셕의 효력을 엇지 못하고 드듸어 이십이일 오젼 열한시 사십오분에 상해(上海) 법조계(法曹界) 망지로(望志路) 영길리(永吉里) 객사에서 향년 오십칠세를 일긔로 한만흔 세상을 떠나고 말앗다더라.(상해 이십이일 발 특뎐═연착) (사진은 댱서한 로빅린 씨)

漢江(한강)의 船遊(선유)가
最後(최후)의 離別(이별)
공사 간에 수십년 간
知己友(지기우) 崔麟(최린) 氏(씨) 談(담)

별항 로백린 씨의 비보를 가지고 평소부터 씨와 친교가 잇든 최린(崔麟)씨를 송현동(松峴洞) 자택으로 방문함애 씨는 깜작 놀라면서 처연한 긔색으로
『월전 귀보를 보고 그가 신병으로 신음한다는 것은 알앗소이다마는 그 건댱한 이가 그러케 갑자기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엿슴니다. 지난 뎡사(丁巳)년인가 무오(戍午)년인가 분명히 모르겟소마는 씨의 경과가 대단히 곤난하여서 조선에 잇지 못하게 되엿슴으로 부득이 만주로 떠낫슴니다. 정사년인가 어느 해 팔월경에 그가 나에게 와서 한강으로 놀러가자 하기에 가치 갓더니 그는 나와 단둘이 선유(船遊)를 하면서 만주 떠날 결심을 말합듸다그려. 그래서 둘이 손목을 마조 잡고 락루까지 하고 작별을 하엿는데 그것이 영결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아겟슴닛가. 호방한 중에 극히 치밀한 성격을 가지고 각색 활동을 하든 그를 일허버림은 우리의 큰 손실이지요. 특히 나는 공사 간에 수십년 지긔(知己)로 지나든 터이닛가 무엇이라 할 말이 업소. 그가 상해에서 공사간(公私間)에 그러케 만흔 고생을 하엿다 하니······』하고 말끗을 맛치지 못한다.

豪膽悲壯(호담비장) 六十年(60년)
豐川(풍천) 出生(출생)으로 逆旅(역려)의 最後(최후)까지


씨는 황해도(黃海道) 풍천(豊川)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재조가 특출하고 용긔가 뛰어나서 동리 사람들이 혹은 신동(神童)이라 하고 혹은 소년력사(少年力士)라 하여 왓다는데 씨의 나희 약관(弱冠)을 바라보게 되엿슬 때에는 국세가 날로 기우러지고 정국이 점차 다단하여 질 때이엇슴으로 남달은 긔질을 타고난 씨는 향촌 구석에서 무명한 일개 선비로 지나기가 실타하야 남달을 뜻을 품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륙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에 입학을 하엿다 한다.

光武(광무) 三年(3년)에
귀국하야 륙군 참위


씨는 그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광무(光武) 삼년(三年)에 조선으로 건너와서 구한국 정부의 륙군참위(陸軍參尉)가 되는 동시에 관립 무관학교(武官學校) 교관이 되여 가지고 영재(英才)의 교□에 심혈을 다하여 오다가 다시 헌병사령관 (憲兵司令官) 군부군무국댱(軍部軍務局長) 등을 력임한 후 그 당시 조선서 일흠 놉든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 교댱으로 잠간 재직하다가 다시 련성학교댱(硏成學校長)으로 되어 가지고 수만흔 조선의 젊은 일군에게 무풍(武風)을 고취하엿다 한다.

軍隊(군대) 解散(해산) 後(후)
혁신피혁뎜을 창설


의외의 폭풍이 조선의 정계를 휩쓸어 나라의 주석(柱石)인 군대를 해산하게 됨애 씨는 비분한 눈물을 뿌리고 그 당시 조뎡에 잇는 관료들을 꾸지즌 후 외로운 칼을 어루만지면서 당시 사동(寺洞) 윤치성(尹致晟)씨와 혁신피혁뎜(革新皮革店)을 창설하고 불우(不遇)의 몸을 붓치며 얼마 동안 지난 일까지 잇섯다 한다. 얼른 보기에 호활방종(豪活放縱)이 짝이 업는 씨로도 내용으로는 두뢰가 명석하고 계획이 정세하야 여간 일에는 거연히 동하지도 아니하엿다 하며 특히 씨에게는 부하를 통솔하는 절대한 힘이 잇섯다 한다.

秋霜(추상) 갓흔 威風(위풍)
반면에는 화긔융융


씨의 건강한 골격과 늠늠한 풍채가 나타나는 곳마다 화긔가 돌며 우슴의 꼿이 피어 누구든지 씨를 반기지 안는 사람이 업섯스나 그 반면으로 씨는 엿보기 어려운 위풍을 갓추고 범할 수 업는 긔백을 가젓슴으로 감히 씨를 갓가히 하는 사람이 업섯다 한다. 그럼으로 씨의 말이라면 누구든지 감히 거역하는 사람이 업섯다는데 훈련원(訓練院)에 교련장(敎練塲)을 닥고 군인구락부(軍人俱樂部)를 건설하는 등 조선 군인이 씨의 힘으로 편의를 어든 일도 만헛다 한다═계속

상하이에서 타계한
계원 노백린 씨
신병으로 실성까지 됐던
계원 노백린 씨 결국 서거
【22일 오전 11시 45분】


기보═뜻밖에 실성이란 병보를 전하던 계원 로백린 씨는 며칠 전부터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져서 여러 약의 효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22일 오전 11시 45분에 상하이 프랑스조계 왕지루 용지더 객사에서 향년 51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상하이 22일 발 특전═연착) (사진은 타계한 노백린 씨)

한강의 뱃놀이가
최후의 이별
공사 간에 수십년 간
지기친구 최린 씨 말


별도 기사 노백린 씨의 비보를 들고 평소부터 그와 친교가 있던 최린 씨를 송현동 자택으로 방문하자 최 씨는 깜짝 놀라면서 처연한 표정으로 “몇 개월 전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그가 신병으로 신음한다는 것은 알았소이다만 그 건장한 이가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1917년인가 1918년인가 분명히 모르겠소만 그의 생활이 대단히 곤란해서 조선에 있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만주로 떠났습니다. 1917년인가 어느 해 8월경에 그가 나한테 와서 한강으로 놀러가자 하기에 같이 갔더니 그는 나와 단둘이 뱃놀이를 하면서 만주로 떠날 결심을 말합디다그려. 그래서 둘이 손목을 마주 잡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작별했는데 그것이 영영 이별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호방하면서도 극히 치밀한 성격을 지니고 여러 활동을 하던 그를 잃어버림은 우리의 큰 손실이지요. 특히 나는 공사 간에 수십년 지기로 지내던 터이니까 무엇이라 할 말이 없소. 그가 상하이에서 공사 간에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다 하니······”하고 말끝을 맺지 못한다.

호담비장 50년
풍천 출생으로 나그네의 최후까지


그는 황해도 풍천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재주가 특출하고 용기가 뛰어나서 동네 사람들이 혹은 신동이라 하고 혹은 소년역사라 해왔는데 그의 나이 약관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에는 국세가 날로 기울어지고 정국이 점차 복잡해질 때였으므로 남다른 기질을 타고난 그는 시골구석에서 이름 없는 일개 선비로 지내기가 싫다고 하여 남다른 뜻을 품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했다고 한다.

1899년에
귀국해 육군 참위로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1899년에 조선으로 건너와서 대한제국 정부의 육군 참위가 되는 동시에 관립 무관학교 교관이 되어 영재의 교□에 심혈을 다해 오다가 다시 헌병사령관 군부군무국장 등을 지낸 뒤 그 당시 조선에서 이름이 높던 보성중학교 교장으로 잠깐 재직하다가 다시 연성학교장이 되어 수많은 조선의 젊은 일군에게 무인의 기풍을 고취하였다고 한다.

군대 해산 뒤
혁신피혁점을 창설


의외의 폭풍이 조선의 정계를 휩쓸어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인 군대를 해산하게 되자 그는 비분의 눈물을 뿌리고 그 당시 조정에 있는 관료들을 꾸짖은 뒤 외로운 칼을 어루만지면서 당시 사동의 윤치성 씨와 혁신피혁점을 창설하고 불우의 몸을 붙이며 얼마 동안 지낸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얼른 보기에 호활방종하기 짝이 없는 그로도 속으로는 두뇌가 명석하고 계획이 정밀해 여간 일에는 동요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고 하며 특히 그에게는 부하를 통솔하는 절대적인 힘이 있었다고 한다.

추상같은 위풍
다른 면에는 따뜻함 넘쳐


그의 건강한 골격과 늠름한 풍채가 나타나는 곳마다 화기가 돌며 웃음의 꽃이 피어 누구든지 그를 반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 반면으로 그는 엿보기 어려운 위풍을 갖추고 범할 수 없는 기백을 가졌으므로 감히 그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말이라면 누구든지 감히 거역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훈련원에 교련장을 닦고 군인구락부를 건설하는 등 조선 군인이 그의 힘으로 편의를 얻은 일도 많았다고 한다═계속